“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이름

작은 것들 모두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 꽃들에게도, 풀잎에게도, 물방울에게도 / 내 기쁨을 두 배로 해주고 / 내 슬픔을 반으로 줄여주는 친구에게도 /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너에게도 /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 / 왜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픈 것일까! / 이름 부르는 일이 그립다는 말보다 / 왜 이렇게 더 간절한 것일까!(천양희 시인,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이름을 불러주면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기쁨은 두 배가 되고 슬픔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복인지 모릅니다. 또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그와의 추억이 떠올라 빙그레 웃음이 번지는 경험은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래서 이름이란 자신에게는 물론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이 오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결국 사랑이란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이름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존재를 아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란 그 이름이 내 마음에 영원히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청원을 가장 먼저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신의 인생을 담은 청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하며 아버지를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길을 따르는 길 역시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26).

적당히 희생해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땅에 떨어져 어두운 땅 속에 묻히고 죽고 썩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기는커녕 땅에 떨어지는 것도 참지 못합니다. 신앙이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어두운 땅 속에 묻혀 절망의 시간이 지나야 그토록 소망했던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 수난이 다가 왔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요 12:27-28).

그분은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을 아시면서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주님께 주어졌던 사명과 똑같은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게 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오셨던 것처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똑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하셨던 것처럼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청원은 '우리도 주님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라는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살아갈 때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

또한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보통 경쟁에 이기고 경기에서 승리하고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반대로 성경은 십자가를 승리한 사건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분명한 패배이며 비참한 죽음인 십자가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해 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성공과 실패는 세상의 방식에 의해 판단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방식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왜곡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평생 교회 다니고 열심히 믿기를 원하지만 영적 성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었지만 믿음의 기초가 부족합니다. 믿음이 감정의 변화에 따라 널뛰듯 합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인식하지 못하고 더 큰 은혜를 찾아 다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뜨거워 보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무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입도 뻥끗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인 십자가의 의미, 진정한 승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스스로 그것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어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세상은 그러한 방식의 성공을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면, 비움의 의미, 고난의 신비, 섬김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진정성은 바로 그러한 길들을 통해 입증되었고, 그와 같은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 길을 걸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던 것처럼 우리도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고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여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기 위해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방식이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의 방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승리하고 기적이 나타나야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아지고 비워지고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사도 바울처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는 것이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고 우리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음을 보이는 일이야말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고 우리가 그 자유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가장 큰 영광,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높여 주십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그리스도 찬가'로 알려진 빌립보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9-11).

하나님을 높이는 자는 결국 자기를 높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영광은 이미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우리가 가장 행복하고 존귀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는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처럼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겸손한 심령에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이름을 주실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수동태입니다. 행위의 주체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문장의 주어가 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기도하는 자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자신이고 세 번째는 세상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기도하는 내용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주기도를 이루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주기도를 드리는 사람 자신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청원을 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보여 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 주게 됩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면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6).

우리의 소망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두 번째 주체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의 말이니라"(겔 36:23).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나라, 하나님께서 사랑을 쏟아 부으신 하나님 백성들의 나라가 망했습니다. 세상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지킬 힘이 없어 망했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더 이상 더럽혀지지 않도록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 때문에 스스로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스스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행동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신다는 그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해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의 자녀답게 빚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가장 강력한 기도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빚어 만드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분을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시편 기자 역시 똑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하나님 나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세 번째 주체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믿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확신하는 것은 그분께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어 나갈 때마다 그분의 이름은 점점 더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할 때 온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온전히 거룩해지는 순간입니다.

마침내 창조 세계로부터 온전히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때 그분의 창조는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창조의 완성을 위한 기도입니다. 위대하신 그분의 창조 사역에 우리가 기도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보다 더 높은 일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청원을 드릴 때 우리는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이며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때 우리의 이름 또한 지극히 높여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영적 생활에 더욱 힘씁시다. 삶이 어려울수록 더욱 그렇게 합시다.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위로부터 옵니다. 그 힘과 도우심 없이는 현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설사 이긴다 해도 그 이김이 오히려 사단의 올무가 됩니다. 타락의 계기가 되어 버립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사귑시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영적 교제 가운데 서로 섬깁시다. 사랑의 봉사로 서로 섬깁시다. 그것이 바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이며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녀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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