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르 클레지오는 이승우에 대해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바로 이 작가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또한 그는 국내에서도 이상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과 같은 권위 있는 문학상들을 몽땅 수상한, 화려한 문단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왜 그럴까? 그의 소설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문장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데 정성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너무 어둡기 때문에? 아닌 게 아니라 내 경우, 그의 책을 읽고 나면 정서적 회복이나 생명력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 후유증으로 회색빛 고뇌에 찬 며칠을 보내기도 한다. 아마 이 무거운 느낌이 이승우의 소설이 독자층을 많이 확보하지 못하는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이승우는 서울신학대학교를 거쳐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다녔다. 이러한 학력은 그가 기독교적 사상에 침몰했던 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전체 작품에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흐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다른 기독교 문학서적들처럼 무조건적인 주 찬양 일색의 신앙관을 드러내기보다는, 상처 입은 인간의 몸부림과 고뇌에서 흘러나오는 피 냄새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작가는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에리직톤의 초상』이 당선됨으로써 등단했다. 이 소설에 대해 작가는 “내 이십 대의 십 년 동안 이 소설만 쓰고 산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과 함께 산 것은 맞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소설에 붙들려 있었고, 그러면서 이 소설에서 놓여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이에 등단작이면서 작가가 가장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에리직톤의 초상』을 숙고해 본다는 것은 이승우 문학의 출발점이자 핵심을 엿보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 하겠다.

이 작품의 화자인 ‘나’는 한때 신학 교수의 딸 혜령을 사랑했다. 그런데 혜령은 자기의 성경 공부 제자였던 형석을 사랑하여 그와 함께 뮌헨으로 떠나버리고 만다. 이 소설은 화자인 나보다 형석이 뮌헨에서 어떻게 살다 죽어갔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또한 형석의 삶이 실제로 일어났던 교황 저격 사건과 그리스 에리직톤 신화와 어떻게 맞물리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먼저 제목에 언급된 에리직톤에 대해 살펴보자.  에리직톤은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끼는 저주를 받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자이다. 허기가 너무 심해 재산을 다 팔았고, 하나밖에 없는 착한 딸까지 팔아 음식을 사먹었는데도 허기는 멈추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팔다리를 뜯어먹다가 비참하게 죽고 마는데, 이 절망적인 허기는 전에 그가 시어리어스라는 여신이 아끼는 참나무를 도끼질하여 얻게 된 형벌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화두로 소개된 에리직톤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형석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형석은 불운한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아홉 살 때에 이미 옥상에서 뛰어내려 시멘트 바닥에 자기 몸을 박살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고, 그 후에도 계속 폭력 피해자로서의 굴욕감과 수치심을 절감하면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혜령과 뮌헨으로 떠난 후, 그녀의 희생적인 내조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포기하고 사격과 등산에 열중한다. 게다가 여러 여자들과 성적으로도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의 상한 영혼은 뮌헨에서의 생활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모욕감만 불러일으키는 뮌헨을 떠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추크슈비채 산꼭대기로 향한다. 하지만 산 정상에서 느낀 것은 호연지기나 성취감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기꺼이 함몰하여 한 몸이 될 것을 요구하는 산의 음모, 날갯짓을 하며 처연하게 낙화할 것을 부추기는 유혹”뿐이었다.

산에서도 좌절감만 느낀 그의 앞에 델브루케라는 사내가 나타난다. 그들은 사격연습장에서 만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델브루케는 형석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매김을 한다. 델브루케는 “표적을 향해 쏘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비뚤어진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성 베드로 성당 앞에 나타난 교황을 저격할 계획을 세운다. 형석도 이 계획에 가담하여 교황을 쏘기로 한다. 교황이 나타난 날, 델브루케는 형석보다 한 발 앞서 교황을 향해 총알을 날린다. 현장에 함께 있었던 형석은 총을 쏘지 못하고, 결국 추크슈비채에서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여기서 형석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간절히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고, 구원이 손에 잡히지 않아 절망하고 있었던”(160) 존재라는 점에서 에리직톤과 유사하다.

그런데 총기 사건과 관련하여 이 작품에는 문제점이 있다. 아무리 과거가 암울했다고 해도 구원을 총 쏘는 것과 연결한 것, 교황을 죽임으로써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 등, 비윤리성에 대한 문책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델브루케는 말할 것도 없고,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형석의 논리 역시 따라가다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규정조차 모호한 지경에 이르게 되고, 사상의 궤변적 통로 곳곳에서 혼란스러움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카인은 아벨의 숨겨진 얼굴이고, 아벨은 카인의 다른 모습이다. (...) 예수에게서 더 이상 폭력과 희생은 구별되지 않는다”(268-9). 이런 문장들은 억지를 부린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 문학을 논할 때 이 작품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가 형석을 다만 몹쓸 탕자로 치부하지 않고  “인간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님을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에 부닥쳐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벼랑 앞에” (160) 서 있는 자로나름,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실존적 존재로 묘사하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또한 안일하게 구원을 순간적 사건으로만 이해하고, 이후 이어지는 삶을 무감각하고 게으르게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에게 반성을 촉구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무수히 영혼의 상처를 입은 개인에게 기독교적 구원이 어떻게 변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진지하고도 실천적인 모색의 한 지층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작품이 한국 기독교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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