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돈이 지배하는 세상

사람들은 돈이란 중립적인 가치 교환의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목사님 가운데 한 분도 돈이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이고 다만 그것을 쓰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며, '청부론'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선 분명 돈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격체(맘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사도 바울의 글에서도 돈이 얼마나 악한 영적 실체인가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말씀들이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돈은 있어야지요.”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을 스스럼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나 돈은 중립적인 가치 교환의 수단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는 강력한 권세입니다.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인간의 자긍심을 자극하고 한껏 자신을 숨기면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만들거나 교만의 늪에 빠져 멸망의 길을 걷게 만드는 무서운 실체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돈의 실체를 반드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청원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소금이고 빛이 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돈 많이 버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슬프고도 안타까운 아이러니입니다.

이스라엘의 사명

하나님 나라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공의가 시행되는 사회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의 빛이 된다는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지고 왕이라는 세상의 제도를 도입한 이후, 점점 더 타락하게 되었고 각계각층에서 택함을 받은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에게 촉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촉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의 암소들아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멩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아모스 4:1-3).

이스라엘 도시 부유층의 사치는 범죄나 다름없었습니다. 불의가 판을 치는 곳에서 늘 그렇듯이 그들의 사치는 궁핍한 사람들의 고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 부자 여인들을 고급 품종인 바산의 암소라 칭하면서, 그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말하는 여자들은 남편의 배후에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부자 여인들은 선지자들이 지적하는 부패한 법정과 비열한 상행위의 배후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줄줄이 묶여 유배지로 끌려가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장래는 참담해질 것이었습니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서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5:7, 10-15).

권력자들은 정의를 "인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진은 쓴 맛 나는 식물로 재난의 쓰라림을 묘사할 때 쓰입니다.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란 재판관을 말하는데, 송사가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로 말미암아 착취한 자들의 삶은 결국 좌절할 것입니다. 불의한 행실의 결과를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의 남은 자들

이스라엘 백성이 참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할 때라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요셉의 남은 자들"이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남아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선지서들에는 이스라엘의 불의에 관한 고발들이 공통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어야 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새 이스라엘이 된 우리도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회를 이루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이루지 못할 때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남은 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역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요셉의 남은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하나님 나라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정말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신 임마누엘로서 당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당신께 주어졌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권세에 기초해 제자들에게 그것을 실현시키라고, 다시 말해 그 권위의 대리인으로 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부활은 주님이신 예수님의 주권에 기초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명을 의미합니다.

마태가 말하는 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즉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임마누엘이 이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이시며, 부활과 함께 시작된 새 세대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완성하는 그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20-21장은 두 개의 주제를 제시합니다. 새 날과 새 사명입니다. 부활이 새 창조를 시작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말씀이 이제는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하는 말씀이 된 것입니다.

부활은 새 날이 밝았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하셨던 그 일을 이제는 제자들이 온 세상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그 제자들이 제자 삼은 모든 이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20:21)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명은 도구와 함께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성령을 받으셨던 것처럼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성령은 단순히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성령이 주어진 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새로운 사명

20장에서 선언된 새로운 임무에 대한 중추적인 진술을 21장에서 접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갔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게 도와주시면서 베드로를 어부가 아니라 양치기로 부르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고기잡이'는 제자들이 하고 있었던 일을 의미하고, 양치기는 새 창조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임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관심도 양 치는 일로 돌려야 합니다.

어부에서 양치기가 되는 베드로의 변화는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질문을 던지심으로 베드로가 했던 세 번의 부인을 상기시키시고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시며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비극은 많은 사람들이 고기잡이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변화입니다. 고기 잡는 어부에서 양을 치는 양치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인 교회는 똑같은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일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부활을 계기로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분이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그 길에서 그분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 주는 약속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신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왕으로 등극하신 그분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곧 우리의 사명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돈의 권세는 날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신자본주의라는 미명 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막강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돈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 우리의 전부임을, 삶으로 그리고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통해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청원을 진지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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