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 의지할 곳을 찾던 사람들이 가장 큰 힘을 가진 분이라 여겨지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옵니다. 그곳에서 기도할 수 있고, 보호 받을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바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큰 힘을 가지신 분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가능케 하신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을 선택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과 안정과 번영을 찾아 그분을 찾는 것은 전혀 다른 길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시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그분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들을 부르시고 그분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라고 하십니다.

반면 모든 동화는 성공한 이후의 삶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는데, 결혼 생활과 늙은 다음 이야기까지 소개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눈속임이며 인간들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러한 인간 심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문학작품이 괴테의 「파우스트」입니다. 괴테는 독일에 전해져 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이 희곡을 썼습니다. 파우스트는 자기의 영혼을 악마에게 주는 대가로 세상에서 그가 원하던 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광대한 토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함으로써 인생의 의의를 발견합니다. 개인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하는 것이 가장 숭고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마침내 파우스트의 영혼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손에서 벗어나 승천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파우스트가 보여 주듯이 인간이란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세상에서 성공하여 개인적인 쾌락을 얻으려 하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바로 그런 인간들을 정신 차리게 하는 기도입니다. 성공과 쾌락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들에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기도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오늘날이라는 단어를 ‘요즘’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쉬운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오늘'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분의 양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하루분의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청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하루분의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너무 많은 것을 쌓아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청원을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절제의 기도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러한 뜻이 함축되어 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청원은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 포괄적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이 청원을 제대로 이해하게 해주는 사건은 광야에서의 만나 사건입니다.

로베르티 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 40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광야란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열매를 채취하거나 짐승을 사냥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있을 리 만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 것입니다. 만나는 매일 아침 내리는 작고 둥근 서리 같은 것으로 그 빛깔이 희고 꿀 섞은 과자 맛이 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신기한 만나를 보고 놀랐고,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하루치 분량만 걷도록 하셨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습니다(출 16:17-18).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도 기적이지만, 많게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그 양을 재보니 한 오멜로 같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모든 사람이 공평해지는 것입니다. 높은 자를 내리치셔서 낮추시고 낮은 자를 들어 높이시는데 그 결과는 역전이 아니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평평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높아져도 결국 똑같아집니다. 아무리 낮아져도 결국 똑같아집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높아지려고 기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낮아졌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되로 재어보면 한 오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생산되는 음식들을 공평하게 나눠 먹으면 지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먹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굶고 있습니다. 너무 먹는 이들은 비만 등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도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루 분보다 더 많은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둔 만나에선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겨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이 거둔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거두어야 할 몫이었습니다. 결국 다 먹지도 못하고 굶주린 동료만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여 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에 만나를 많이 주실 수도 있었고 썩지 않는 만나를 주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날마다 하루치의 만나를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만나 사건을 통해 세 가지 훈련을 받게 됩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

첫 번째 훈련은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노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일은 그릇을 들고 나가 만나를 퍼오는 것뿐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보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밭을 가꾸고 씨를 뿌리고 돌보는 일은 사람이 하지만, 생명이 자라고 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치고 땅이 영양을 공급하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씨앗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땅이라는 생명의 자궁이 있습니다. 햇빛과 기후와 공기와 물과 같은 환경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들고 주관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먹을거리가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더해집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바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청원입니다. 따라서 이 청원은 우리에게 매일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 번째 훈련은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3절은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하신 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십 일 간 금식하시고 굶주리신 예수님에게 사단은 돌들이 변하여 떡이 되는 기적을 행하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셔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육적인 양식보다 영적인 양식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신명기를 인용하신 이유는 물질을 얻는 방식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잘 보여 줍니다. 가나안에 입성한 그들은 주변 국가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해 풍성한 소출을 얻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도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물질을 공급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속이고, 경쟁에서 이겨 남을 딛고 서야 물질을 얻을 수 있다는 물신주의 신화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물질이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믿음까지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즉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세상에서 망한다는 사고가 은연중에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를 채우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습니다. 하나님까지 돈에 의해 판단될 정도로 물신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시고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여기서 만나가 화려한 음식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시간이 흐르자 만나에 싫증나서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와 각종 양념이 들어간 음식들을 그리워했습니다. 지금은 더더욱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에서 벗어나 즐기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고자 하십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정직하게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기업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 실현하길 원하십니다. 물질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사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 영적 전투임을 말해 줍니다. 영적 투쟁은 가치관의 투쟁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주기도의 청원은 물질을 공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배불리 먹게 된다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주님 말씀의 의미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삶

세 번째 훈련은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쌓아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풍요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의 방식입니다.

비워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비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쪽에 쌓아둔 만큼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굶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살기는 어렵습니다. 음식이 쌓였다가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경우가 잦습니다. 아까운 마음에 버리지 않으면 똑같은 음식이 지겨워집니다. 참으로 사치한 삶이요, 배부른 소리인데도 우리는 절약한다고 생각하고, 그래도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 주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주기도의 청원입니다.

현대는 과소비를 조장하고 부추깁니다. 과소비에 행복이 있고 많이 쌓아 놓을수록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걱정으로 사재기까지 하면 집안에 더 이상 물건을 쌓아둘 곳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비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집으로 이사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간결한 삶, 검소한 삶의 태도가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되는 시대가 지나간 듯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듣게 될 말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입니다. 사람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우리는 가난한 나라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쌓아 놓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몫을 가로채 다른 이들을 굶주림에 처하게 하는 범죄이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오늘 우리의 풍족함을 축복의 증거라고 떠드는 대신, "네 찬장에서 썩고 있는 음식은 굶주린 자의 양식이다."라는 바실리우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물질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물질에 대한 마음을 전부 거두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일부는 물질에 두고 일부만 하나님께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하나님 모두 우리의 마음 전부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한 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는 사고는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물질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을 부인하는 처사입니다. 물질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때 물질에 대한 바른 시각이 생기고 물질을 제대로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청원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백입니다.

신앙이란 삶을 통해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이 따로 있고 세상적인 것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물질에 대한 사고가 신앙을 대변합니다. 우리 손에 들어온 모든 물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내 손에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를 맡은 청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그분의 사랑에 온전한 사랑으로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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