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삶의 의미

"삶은 의미가 없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자는 병든 자이다."라고 프로이트는 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지 않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나치 시절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고통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수감자들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수용소에서의 경험과 관찰을 통해 깨달은 바를 이용해 '로고테라피'라는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했습니다. '로고'는 의미를 뜻하는 '로고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프랭클은 인간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필요하듯이 삶의 의미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미를 부여하려면 어떤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주기도의 마지막 청원은 바로 그러한 기준에 맞추기 위한 하나님 백성의 기도입니다. 시험에 든다는 것과 악에 빠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 뜻에서 벗어나기 쉬운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청원을 진지하게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원될 때 모든 주기도의 간구들 또한 실현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의 의미 또한 분명해질 것입니다.

시험의 아이러니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은 다름 아닌 시험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잘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나가 금식하셨습니다.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어려운 시험이었지만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성령에게 이끌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성령에게 이끌리시지 않았다면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시험은 숙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이 성령께 이끌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험 받는 것은 성령께 이끌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장악한 마귀의 공격을 받는 것은 하나님 백성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귀의 공격은 한 번 이겼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험 기사의 끝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 4:13).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시고 공생애의 삶으로 나가시는 그 순간 마귀는 완전히가 아니라 얼마 동안 물러갔습니다. 마귀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살피고 있습니다. 약점이 무엇인가 파악한 후에 그것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 있는 한 날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연약한 육체를 가진 우리는 세상 풍파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귀는 우리의 필요와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해 올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청원은 그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성령의 보호를 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제게 힘을 주소서.'

결국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시험에 들어야 하고 시험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십니다. 광야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되려고 할 때 먼저 거쳐야 할 곳은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체득한 것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보여 주신 하나님 백성의 삶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광야

무엇보다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광야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이 되려면 먼저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황량하고 쓸쓸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힘들어 하면서 자신이 작고 초라하다고 느낍니다. 광야라는 말을 들을 때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광야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메마른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한 광야는 우리의 삶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힘들고 통제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내면에 광야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영혼의 메마름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는 영혼의 광야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 광야 외에 개인적인 광야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 때문에 삶이 광야가 됩니다. 어떤 이는 배우자 때문에,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어떤 사람은 미움 때문에, 어떤 사람은 불치의 병으로, 어떤 사람은 장애로 자기의 삶이 광야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인정에 대한 갈구 때문에 어떤 사람은 열등감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우울함을 떨치지 못해 초라한 모습으로 광야를 헤맵니다.

각 사람 안에 있는 광야의 모습은 제각기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광야가 무엇인지 깊이 보고 실체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마음 바닥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우리 삶에 황폐함, 외로움, 목마름 등을 형성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바닥을 대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벌거벗는 일입니다.

적나라한 모습이 되어 자신의 광야를 바라볼 때, 그 광야를 형성하는 정체가 무엇인지를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 자신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광야를 형성하는 그 무엇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바칠 수 있고, 그분께 구원과 해방의 은혜를 청할 수 있게 됩니다. 광야에 서 있는 시간은 반성의 시간이요, 탄원의 시간입니다.

걸림 없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 우리보다 앞서 자유와 해방을 맞이하기 위해 광야에 서야 했던 이스라엘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 위해 광야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출 13:17-18). 하나님께서는 사흘에서 열흘이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광야에 사십 년 머물게 하셨습니다. 광야를 걷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간이었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광야의 존재 목적

광야는 자유를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자유의 땅에 들어가기 전, 누구라도 반드시 광야를 걸어야 합니다. 그 과정은 공간적, 시간적 차원의 중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거듭나는 과정입니다. 사백여 년 간 애굽에서 노예의 삶을 살다가 탈출한 이스라엘은 즉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자리가 바뀌고, 시간이 경과했다고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존재 자체의 변화가 일어나야 했습니다. 자기를 정화하고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광야를 거쳐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광야는 존재 자체가 거듭나는 과정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 되고 자유인이 되기 위해 광야를 거쳐야 했듯이 우리 또한 광야를 거쳐야 합니다. 당장 나와 고통스러울지라도 참된 하나님 백성이 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광야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1)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익숙했던 애굽 세계를 버려야 했습니다. 익숙했던 애굽의 관습과 세계관을 버려야 했습니다. 사백여 년 간 애굽 문화에 젖어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골수에 스며들어 있던 애굽의 잔재들을 털어내야 했습니다.

3천 년 전 애굽은 세계 문화의 중심지이며 최고의 경제적, 군사적 힘을 자랑하는 제국이었습니다. 대학과 도서관 그리고 피라미드가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러한 나라에서 사백 년 이상 살았던 이스라엘이 하루아침에 애굽의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것을 삶으로 살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가치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애굽이라는 옛 습관을 버려야 했습니다. 광야는 과거의 세계관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기 위한 과정입니다.

출애굽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엑소도스'입니다. '엑소도스'는 '엑스'와 '호도스'를 합친 단어입니다. '엑스'는 영어로 'from'이고 '호도스'는 'way'입니다. 즉 그 동안 살아왔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자유인이 되고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습관과 자아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안주해 있었던 세속 중심의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중세 신학자이며 신비가인 에크하르트는 "하나님께 도달하는 과정은 영혼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묻은 그 무엇을 털어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영혼과 정신에 담겨 있던 모든 것을 비우는 장소가 바로 광야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한 부분을 허물고 부수는 일입니다. 애굽에서 사백 년을 살아왔던 이스라엘이 그동안 생명처럼 여기던 것들을 포기하기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무려 4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광야 길을 걸어야 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자주 애굽을 그리워하며, 광야로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원망하는지 보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익숙한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는 일은 존재 자체를 허무는 일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크게 반발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광야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광야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한 미아가 되거나 옛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광야에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부수어야 할 것은 부순 다음,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가 베푸는 첫 번째 은혜입니다.

2) 진정한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에는 광야로 나가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콘스탄틴에 의해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사막으로 들어가 사막의 교부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로 자주 나가 기도하셨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결정적인 시험을 광야에서 받으셨습니다. 특히 중요한 일을 앞두고 광야나 홀로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기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광야는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보여 주는 곳입니다. 인간은 삶의 조건이 결여된 광야에 섰을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끄신 것은 그들에게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근본이심을 체득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삶의 기본 조건이 철저히 말살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광야라는 혹독한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만 의지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목이 탈 때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외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애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다른 민족의 침입을 받아 무서울 때에도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유의 땅으로 인도해 내시기 전에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은 그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양육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의 악조건을 통해 인간의 삶에서 최우선은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적인 계획이 통하지 않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고통스런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독과 무력함 속에서, 마침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가장 첫 번째 자리를 그분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광야가 우리에게 베푸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야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광야는 우리 영혼에게 기회입니다. 광야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보물과도 같은 곳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병고와 가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광야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광야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우리를 깨달음으로 초대합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삶의 의미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광야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의 삶 자체가 광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광야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덧없는 것에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명예입니까? 돈입니까? 인간관계입니까? 자식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입니까? 그 중요한 것을 얻고 삶의 의미까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실 때 우리는 해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자란?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는 광야 체험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당신의 백성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 것에 늘 시선을 집중합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제자로의 거듭남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삶이며 이미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왜곡되는 것은 존재의 변화가 아니라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가 이루어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때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일에 집중하면 결과에 연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면 위선과 교만이라는 시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 아닙니다. 작은 자가 되어 작은 일을 하려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시험을 마친 예수님에게서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기회를 잡기 위한 작전상 후퇴입니다. 광야 체험과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마귀는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마귀는 참된 하나님 백성이 되지 못한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공격하지도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시험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 된 우리들은 날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광야 체험은 은혜입니다.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병고와 가난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광야 체험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아는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 신앙의 자세를 가질 때 마귀는 우리를 시험하지 못합니다. 날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청원하면서 인생의 모든 정황들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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