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었어?”

1년 반 만에 인천 중증요양원에 계신 엄마를 만나러 갔다. 4년 전 어느날 낮잠을 주무시다가 다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셨을 때, 종합병원 의사는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노인성 질환인 사지장애에다 파킨슨 증상까지 있다고 말했다. 통증을 줄이기 위해 두 번의 시술을 받으셨지만, 그날 이후 엄마는 혼자서 일어서지도, 앉지도, 돌아눕지도 못하신다.

중증요양원에서의 끼니 때마다 불고기인지, 나물인지, 감자 조림인지 전혀 구분이 안 되게 다져 놓은 반찬을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에 얹으시는 엄마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왔다. 그때마다 나는 참 나쁜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해보다 인지 기능이 많이 떨어지신 엄마가 그 밥을 같이 나누어 먹자고 하셨다. 같이 먹었으면 엄마의 입맛이 좀 더 살아났을지도 모르는데, 철없는 자식으로 남고 싶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맛있다는 표정으로 죽이 된 반찬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십수 년 전 미국으로 이민 온  뒤, 한국에서 홀로 사시던 엄마의 집에 가면, 엄마는 하루종일 고았을 게 분명한 사골국이며 갈비찜 등 푸짐한 요리들을 만들어 놓고 나를 기다리셨다. 그런데 나는 젊어선 시부모 모신다는 핑계로, 나이 들어선 태평양 건너에 산다는 핑계로 엄마에게 정성 들여 밥을 지어 드린 적이 거의 없다. 엄마가 나를 위해 밥을 지어 주는 게 당연하다면서, 엄마가 늙어가시는 건 모르는 체, 병들어가는 건 모른 채로 그 밥을 당연하게 먹었더랬다.

지난해처럼 이번 한국 방문 중에도 요양원에 매일 출근했다. 그때마다 병실 밖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할머니가 쉬지 않고 외치시는 그 말은 알아듣기가 힘들었는데, 한 요양보호사가 귀띔해 주었다. 그 할머니의 연세는 107세라고 했다. 처음 요양원에 오셨을 때에는 정신이 온전하시고 기도를 많이 하시던 분이었는데, 치매에 걸린 뒤부터 늘 같은 말을 외치신다고 했다. “하나님! 밥 주세요! 하나님! 밥 주세요!” 밥 먹고 돌아서면 또 밥을 달라고 조르는 치매 증상이 그 할머니에게는 기도가 되었나 보았다. 요양원에 계신 노인들의 70% 이상이 치매와 행동 장애를 가진 분들이라고 했다.  치매 증상으로 노인들이 도둑으로 몰거나 밥 안 준다고 화를 내고 거친 말을 퍼부을 때, 요양보호사들은 병 때문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 하지만 107세 할머니의 치매 증상은 간병하는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염려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침상에 누워서도 엄마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밥 먹었어?”라고 물으셨다. 치매 비슷한 퇴행 증세를 보이시는 엄마는 온종일 군것질을 달라고 조르셨지만, 엄마의 자리를 되찾는 순간에는“배고프지 않아?  얼른 나가서 먹고 와”라고 말씀하셨다. 밥을 지어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하셨다.

문득 “밥 묵었나?”“밥 묵으라!”가 인사말이었던 친할머니의 음성이 엄마의 목소리에 오버랩되었다.  집에 오는 이들은 무조건 밥을 먹여야 할머니는 직성이 풀리고 안심하셨더랬다. 할머니의 이 한 마디는 가난한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네에서 마음이 허기진 핏줄이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투박하지만 따스한 위로 한 사발이 되었을 것이다.

밥은 하늘입니다

열흘이라는 방문 기간이 짧아서 사촌 언니와 삼촌에게만 연락했더니, 먼 거리 마다 않고 달려와서는 비싼 밥집에 나를 데려갔다. 요양원까지 직접 찾아온 남편의 친구 역시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밥집에 가야 한다고 채근했다. 모두들 “최소 두 끼는 나누어야 하는데 한 끼는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그렇다! 밥을 자주 나눌수록 사랑이 깊어진다는 진리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그러한‘밥’을 생각하면 반드시 김지하 시인의 ‘밥’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중증요양원에서 엄마는 주일마다 이 시구를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 계신다. 하늘인 밥을 엄마의 몸속에 모시고 있다. 침상에서 성찬 의식에 참여하신다.

 

따뜻한 밥

밥에 대한 묵상을 이어가다 보니, 문득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생선을 구워 주신 장면이  떠올랐다. 복음서 이름이나 장절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스해지면서 동시에 슬퍼진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고 보니, 숯불이 지펴져 있고, 그 위에 물고기와 빵이 익고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방금 잡은 물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시몬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힘을 합쳐 그물을 바닷가로 끌어올렸는데,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되었다. 그렇게 많은 물고기가 들었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침식사가 준비됐다.” 제자들 가운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물고기도 그들에게 주셨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살아 있는 모습을 보이신 것은 이번이 세번째였다(요한복음 21:9-14, 메시지 성경).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그물에 물고기를 가득 채워 주시고,  빵과 물고기를 구워 제자들을 먹이셨다. 베드로에게서 사랑을 확인하시고, 선교 사명을 주시기 전에 물리적인 위장부터 채워 주셨다.

외로움이나 그리움이 깊어지거나 마음에 입은 상처가 너무 크면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끓이지 않은 날 라면을 열 개 가까이 먹고도 탈이 나지 않았다는 다섯 살 고아의 이야기는 세월이 가도 잊히질 않는다. 그 아이의 양엄마가 된 분은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했다. 정신적으로 허기가 지면 라면을 아무리 먹어도 절대로 배탈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채워지지 않을 이별의 허기를 달래 주시려고 제자들에게 밥부터 먹이셨나 보다.

그나저나 ‘밥’이라는 단어는 지루한 일상의 동의어로 느껴지기도 하고, 별식의 반대말로도 보인다. 침상에서 받는 엄마의 외로운 밥상에, 친척들이 끌고 간 비싼 맛집 밥상에, 시차 적응 못해 새벽에 찾아간 24시간 김밥 가게 식탁에 ‘따뜻하다’라는 형용사를 슬며시 올려 본다. 밥상의 온도가 올라가고 숟가락 잡은 사람들의 손끝 체온이 올라가는 듯하다. 따뜻한 밥 나눔!!(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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