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덴마크의 종교철학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고민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행하느냐’였듯이, 우리의 분별 과정에서 ‘무엇을 분별하는가’를 알았다면, 이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가’ 혹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가’의‘어떻게’로 넘어갈 때가 됐다. ‘어떻게’를 어떻게 찾고 규명하는가가 결국 분별의 성패를 좌우한다. 키에르케고르보다 약 400년 먼저 태어난 마르틴 루터 역시 “신성은 사용과 실천 속에 존재하며, 사변과 묵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가장 첨예하고 긴박한 문제를 접했을 때, 무엇을 참고해 혹은 무엇에 의존해 의사를 결정하는가? 나는 당장 아내의 큰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수술의는 온갖 겁을 주며 바로 수술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말 방사선 및 항암 치료, 2월 말 부분  수술을 했고, 아직 몸에 암세포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조사하게 해달라고 해도 알 수 없다면서, 단 재발이 문제이니 바로 수술하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직장을 다 잘라내야 하고 인공항문을 영구히 달아야 한다면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어떻게’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무엇으로 아는가 하는 (신학적인) 문제를 반영한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의사 결정 방법이 있다. 어떤 이는 생각하고 나서 결정할 거고, 어떤 이는 결정하고 나서 생각할 것이다. 어떤 이는 대단히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 신중히 결정할 거고, 성질이 급하거나 시간에 민감한 어떤 이는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즉각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신앙적으로도, 어떤 이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찾을 것이고(성경주의자), 어떤 이는 성령이 오시기만을 부르짖을 것이다(성령주의자). 어떤 이는 어젯밤의 꿈이 하나님의 계시라 믿을 것이고(계시주의자), 어떤 이는 교회 전통에 따른 의사 결정을 희망할 것이다(전통주의자). 어떤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유하게 주신 이성을 소중하게 여기며 득과 실을 따져 의사를 결정할 것이고(계몽주의자), 어떤 이는 감정의 변화에 반응하며 의사를 결정할 것이다(심리주의자). 어떤 이는 결정의 결과를 우선적으로 고민할 것이고(공리주의자), 어떤 이는 결과보다 동기를 우선시할 것이다(과정주의자). 어떤 이는 자신의 문제는 자기가 결정해야 한다고 믿을 것이고(개인주의자), 어떤 이는 공동체의 결정에 의존할 것이다(집단주의자). 우리가 어떤 경로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에 ‘권위’를 두고 의사를 결정하는가는 곧 우리들의 신앙이요, 신학이 된다. 이는 곧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가와 무관하지 않다.

어떻게 분별하는가의 원인을 제공하는 분별의 원천(혹은 권위)은 다양하다. 직접적인 계시(창세기)부터 환상(계시록)까지. 성경 말씀부터 성령의 내적 감동까지. 합리적인 이성부터 순간적인 감정까지. 전통부터 은혜까지. 목사의 조언부터 공동체의 권고까지. 사람마다 문화권마다 분별의 권위는 다양하다.

분별의 권위는 다양하나 그렇다고 모두 동등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 것은 이런 분별의 원천들이 다 동일한 권위를 갖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책 『하나님의 음성』에서 “환상과 꿈과 천사에 대한 현상들이 개인과 교회의 분별에서 예외적이지 않고 주요한 방편이 되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며, “극적인 만남이 주가 된다면 그것은 대체로 영적인 삶의 수준이 덜 성숙했다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윌라드는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세 가지 기준(세 개의 빛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환경’과 ‘성령의 감화’와 ‘성경 말씀’이다. 그는 이 세 가지 기준이 합치될 때를 분별의 때로 보았다. 그는 『주님의 인도하심의 비밀』을 쓴 프레드릭 마이어의 통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환경이 성령의 내적 감화와 하나님의 말씀과 합치될 때, 우리의 일상생활 환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점 없는 지표와 같다. 환경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한 기다리라.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환경이 열리면서 바다와 사막과 바위에 길이 뚫릴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연상하게 하는 이 말은 일견 맞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믿기에는 위험 요소가 있다. 소위 ‘열린 문의 관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환경적인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가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과 성령의 내적 감화의 일치는, 분별의 지혜로서 보편 타당하지만, 환경적 수용의 절대성은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분별할 때 언제나 주어진 환경에 수긍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태도를 ‘믿음’이라고 보는 데 이의는 없다. 믿음이 좋은 자는 늘 수긍/긍정하는 자가 아니었던가? 이는 문이 열려야 들어가는 혹은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를 말하는 것인데, 이 주장은 상황에 매우 민감한 말이다. 만약 문 자체에 결함이 있다면? 무슨 말인가?

우리가 속한 세상/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관점에서‘환경’에 대한 문제는 쉽게 수용할 수 없는 권위나 기준이 될 수 있다. 환경에 순응/긍정적이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을 통해 반드시 말씀하신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에 편만한 불의나 악행에 대해 저항하거나 대항하는 일은, 그러다가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종차별이 상식(환경)이었던 시대를 역행했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분별을 잘못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인종분리가 상식(환경)이었던 시대에 악법의 철폐를 위해 싸우다 26년간 옥살이를 한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사랑의 폭력’만을 강조하다가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에 암살당한 오스카 로메로 주교는?

이처럼 분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음성을 들을 때 환경의 권위와 그에 대한 수용의 문제는 어떤 상황이냐(혹은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어서, 대단히 기민한 상황적인 판단과 해석이 요구된다.

대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지나치게 개인주의화된 작금의 개신교회 환경에서 가장 덜 강조되어 왔던, 특히 문화적으로 목회자 중심의 권위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한국의 개신교회를 위해 분별의 원천으로 ‘공동체의 권위’를 소개하고자 한다. 『들음의 영성』의 저자이자 미국의 영성지도자인 존 애커만의 말이 이때 적절하다. “분별하는 교회는 신자들의 권위보다 성직자의 권위에 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공동체의 권위란 회중에 있는 것이지 소수의 지도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 분별의 원천 혹은 권위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그것은 성경과 성령과 감정(혹은 정서)과 공동체이다. 이 네 가지가 분별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의존해야 할 분별의 권위이자 원천이자 도구가 된다고 믿는다. 이 네 가지 권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중심으로 협력하고 일치하게 될 때, 우리의 분별 역시 독단적인 무소불위의 하나님이 아닌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모습과 같이 가장 균형 잡히고 완전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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