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4-5).

맨발

출애굽기 3장 4-5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그는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동족에 대한 책임감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유모였던 어머니 요게벳과 몸종이었던 누나 미리암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애굽의 바로가 된다면 동족들을 해방시켜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서열 2위의 왕자였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왕자 하나만 제거하면 바로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모르셨을까요? 단 한 사람만 제거하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궁지에 몰아넣으셨습니다. 그는 애굽 감독에게 치도곤을 당하고 있는 동족을 구하려다 살인자가 되었고 쫓기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도와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얼마든지 모세가 한 일을 없는 것처럼 가려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모세가 황궁에서 쫓겨나 황량한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는 것을 방치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점점 무력해졌습니다. 4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흘러 그는 80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지은 시편 구십 편을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인생의 기회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닥난 시점에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는 양 무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습관처럼 서쪽을 쳐다보았습니다. 혹시 애굽에서 보낸 군사들이 자기를 잡으러 오지 않을까 늘 걱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사막에 늘 보이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그럴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가끔씩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바짝 마른 떨기나무에 불이 붙곤 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타다가 불은 사그라졌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의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확인하기 위해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를 향해 갔습니다. 그 순간 떨기나무 가운데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는 깜짝 놀라 허둥대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토록 오래 잊고 있었던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모세에게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시며, 그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마침내 유아 때부터 가슴에 품었던 동족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요구가 맨발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신발을 벗는다'는 표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은 언제나 무방비 상태가 되는 순간에 신을 벗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모세는 신을 벗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맨발은 바로 그러한 상태를 나타내는 성경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맨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변순복 교수는 이력서의 의미를 먼저 설명합니다. 이력서는 회사에 들어갈 때 경력과 학력과 특별한 수상 경력 등을 적은 일종의 자기 소개서입니다. 이력서를 보면 겉으로 드러난 개인사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력서에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과 성취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력서(履歷書)에서 첫 글자는 신발 이(履)입니다. 일개인의 신발이 걸어 다닌 역사가 기록된 문서라는 의미입니다. 변 교수는 이력서를 설명한 후,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이제까지 일개인이 알고 배우고 경험하고 소유한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존재 그 자체로 그분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벗는 순간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모든 지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사십 년 동안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살지 않고 애굽 감독의 어긋난 행동을 보고 주먹을 휘둘렀던 40년 전의 모세 그대로였다면, 떨기나무로부터 음성이 들려오고 같은 요구가 주어졌더라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당신이 누구냐고 확인했을 것이며, 지팡이로 타고 있는 떨기나무를 헤집어 보아야 속이 시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더 이상의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벗으라는 말이 없어도 이미 모든 욕망과 꿈을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에서 신발을 벗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명령에 따라 신발을 벗었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당시의 풍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맨발은 노예라는 표시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셨을 때,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노예에겐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불꽃으로 타오르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요구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전에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을 포기하고 종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십 년 간 양치기로 지낸 후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일종의 포기 의식이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모세는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당신의 종으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지식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전에는 부르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버렸다고 착각하기 일쑤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은 우리와 다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내면의 비밀한 곳에 남아 있는 권리와 소유들을 다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신 예수님

그 완전한 모범을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탄생의 모습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미화하지만 마구간이란 인간의 탄생을 담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장소였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누인 여물통은 그분의 삶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분은 육신의 가족과 함께 사는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그분은 가족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권리도 포기하셨기에 그분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돈도 없었습니다. 명예도 포기하셨습니다. 그분은 사생아로 알려졌고, 멸시 받는 동네에서 자라나셨습니다.

멸시와 천대는 그분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귀신'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으며, 사람들로부터 술주정뱅이에 먹보라는 호칭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가장 흉악한 정치범이 되셔야 했습니다. 마침내 당신의 생명까지 포기하는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수치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분은 남의 무덤에 장사되었고 음부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고 과정이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고, 약속대로 그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고 최종 결과를 알려주면서 우리에게 똑같은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 12)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길

만일 그분을 믿고, 그분의 복음을 믿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길이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정상적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복음에 비추어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영악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기본이고, 끼리끼리 힘을 합해 정권을 창출해내기까지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의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힘을 가진 압력단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목표와 이익을 위해 힘을 가진 자들을 동원할 줄 아는 영리한 이익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교회가 아니고, 세상의 희망이 되지 못하고, 세상 법정을 드나들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맨발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방비 상태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른 지팡이가 권능의 지팡이가 될 수 있고, 서로 사랑할 수 있고, 그분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투입될 수 있고, 미래 교회의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교회로서 세상의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반응하고, 힘을 목표로 삼지 않고, 무력한 존재로 주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종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맨발로 걷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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