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위에 있는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밑에 있는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행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 보라, 날이 이르리니 이 성은 하나넬 망대로부터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측량줄이 곧게 가렙 언덕 밑에 이르고 고아로 돌아 시체와 재의 모든 골짜기와 기드론 시내에 이르는 모든 고지 곧 동쪽 마문의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거룩한 곳이니라 영원히 다시는 뽑거나 전복하지 못할 것이니라"(예레미야 31:31-40).

 

오늘날 사람들의 일상은 분주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작 돌아보면 알맹이가 없습니다. 제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둠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삶의 의미 상실, 모욕 받고 상처 받았던 기억, 경쟁과 실패,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거기에 뿌리박고 있는 분노와 우울 같은 것 아닐까요? 그런 내적인 어려움은 우리를 염려와 걱정덩어리로 만듭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장 영적인 요청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적인 어둠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는 늘 비틀거립니다. 빛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거짓 빛'이 있습니다.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깁니다. 집어등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오징어들의 운명은 죽음입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거짓 빛은 돈과 성공입니다. 돈과 성공은 모든 것을 약속합니다. 실제로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집어등의 불빛과 같습니다. 거짓 빛은 너무 밝아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죽음의 낚시 바늘을 인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위험한 세상입니다. 돈을 매개로 하는 관계가 얼마나 허약한지 잘 알고 있음에도 그것은 집어등처럼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속절없는 인생을 살게 합니다. 강력한 유혹, 그래서 저항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엡 4: 22) 옛 사람의 모습입니다.

신앙은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거기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치열한 저항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참 빛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 빛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야말로 '참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밝게 비추고 포근하게 감쌌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장악하고 있던 세상은 그 빛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네온사인 휘황한 도시에서는 은하수를 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거짓 빛에 사로잡힌 이들은 참 빛을 보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라는 말로 요약해 줍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5:6).

이 빛이 바로 예레미야 31:31-40에서 말하는 새 언약입니다. 그것은 다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빛에 눈을 떠야 합니다. 마음의 빛으로 세상을 비출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겉모습과 소유를 보고 우리를 판단하기 전에 내면의 빛으로 우리 자신을 파악해야 합니다. 정체성뿐 아니라 삶의 순간마다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하며, 최종 목표를 가리키는 북극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길로 삼은 사람은 그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북극성을 따라 항해하는 선원과 같이 목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도, 절망으로 고개를 쳐들 수 없게 된 사람도, 높이 날아오른 자신에 매료되어 발밑에 펼쳐진 풍광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도 다시 고개를 들어 오직 한 분, 우리의 표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4)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인생 막장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힘이 듭니다. 상황이 원망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들의 희망마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원망을 딛고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자신들을 가둘 수 없음을 그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증거합니다. 그들은 치열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참 모습입니다.

내면의 빛

퀘이커의 창시자 조지 폭스는 영국 중부 레스터셔에서 방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해서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신실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8세 되던 해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삶의 기초가 흔들리는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내적인 고민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줄 수 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의심의 밤이 물러가고 새벽이 동텄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은 간결했고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을 반대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했습니다. 박해를 당했지만 그는 내면의 빛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끝까지 걸었습니다.

오늘도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살아가며 전쟁이 일어난 곳 어디에서든 활동하고 있습니다. 내면의 빛을 중시하는 그들은 오늘날 피상적이 되어버린 기독교의 귀감이 됩니다. 폭력의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에게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나라

10세기 경 수도원 원장으로 존경을 받았던 브루노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작은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저녁이 되어 그는 등불을 켜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움막 밖에서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울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기도에 집중할 수 없었던 브루노는 움막 밖으로 나와 개구리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습니다. “야. 이 녀석들아! 수도사가 기도하려고 하는데 왜 이리 시끄럽게 떠드느냐? 너희들 때문에 내가 시끄러워서 기도를 할 수 없다. 그러니 좀 조용히 해라.”

그러자 개구리들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잠잠해졌습니다. 브루노는 움막으로 돌아가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언덕 너머 개구리들까지 가세했는지 더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이었습니다. 브루노는 다시 움막 밖으로 나와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개구리들은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움막 속으로 들어가 기도하려고 하면 개구리들은 또 다시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나오고 들어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브루노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토로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좀 더 깊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 개구리들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도저히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개구리들의 입을 좀 막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때 번개같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왜 너 혼자서만 기도한다고 생각하느냐? 저 개구리들은 기도할 자격이 없고, 찬송할 권리도 없다는 말이냐? 저 개구리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아라. 저 개구리들과 함께 기도하며 찬양하면 안 되겠느냐?”

브루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혼자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개구리들이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밖으로 나와 감격에 찬 음성으로 개구리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오, 개구리 형제들이여.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 함께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마음껏 소리 높여 하나님께 찬송합시다.” 그랬더니 개구리들이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더 큰 소리로 개굴개굴 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연출해내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어두운 세상 한복판에서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갈 때 주님은 그런 우리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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