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로 읽는 아가서 강해(2)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가서 1:5-6).

밤은 인생을 철학적으로 보게 하는 시간입니다. 고요한 만큼 인생의 심연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고, 어두운 만큼 빛과 같은 구원을 절실하게 인식하는 시간입니다. 때로는 기도가 의미없는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고독과 허무가 적당히 어울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더듬는 말이 한층 더 높아간다. 한밤중에 두 손은 빛을 향해 뻗친 채로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도는 미지의 것, 그들의 입술은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의 심장처럼.”이라고 시인 르베르디는 읊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신 앞에서 절대 절망을 고뇌한 밤을 경험한 사람처럼, 그는 인간의 밤에 대한 이중성을 토로했습니다.

밤은 찬란합니다. 창을 열면 총총한 별들이 번짝이는 밤은 고요하고 아름답습니다. 밤은 하루의 피곤을 풀고 안식할 수 있는 시간이며, 우리 여호와께서 인간에 주신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늑하고 포근한 위안을 주는 밤의 침묵은 어머니의 품을 닯았습니다. 어머니의 가슴 같은 밤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밤을 예찬한 프랑스 시인 슈베르 피에르는 어둠을 갈증이라고 노래했지만 그래도 밤은 찬란합니다. 밤은 꿈을 꾸는 안식의 처소입니다.

그러나 밤을 밤 되게 하는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의 성질입니까? 아마 그럴 것입니다. 밤의 성질은 어두움, 바로 그것입니다. 어둡다는 것이 바로 밤의 특성이고, 밤의 본질입니다. 밤은 어두워야 제맛입니다. 밤이 환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밤이 아니라 낮일 것입니다. 그것은 밤의 본질을 잃어버린 변질된 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밤이 아닙니다. “밤은 밤에게 말하고”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밤은 어디까지나 밤이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사랑이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은 사랑이어야 할 것이고 사랑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사랑을 사랑 되게 하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불변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자신이 솔로몬 왕궁의 휘장과 같다는 술람미의 고백은 그러기에 음미해야 할 의미가 많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술람미를 향한 사랑에 의하여 자신이 솔로몬 왕궁의 휘장과 같은 실존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입니다. 그가 솔로몬의 사랑이 된 것은 술람미의 아름다움이나 어떤 충족된 자격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솔로몬의 사랑에 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의 사랑으로 사랑인 술람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 그래서 사랑 그것은 사랑함으로 사랑이도록 하는 생명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가서 2장 4절은 술람미를 예찬합니다.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다.” 그러기에 사랑은 사랑함으로써만 사랑을 사랑이도록 하는 사랑의 생명감인 것입니다.

솔로몬의 휘장은 솔로몬의 사랑의 상징 같은 것입니다. 휘장은 술람미의 허물과 약점을 사랑으로 감싸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광채로 승화시키는 사랑의 생명력 같은 것입니다. 계달의 장막같이 검게 그을린 여인이 솔로몬의 사랑에 의해 휘장 같은 사랑의 실존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솔로몬의 사랑을 예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과연 인간의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만이 인간의 모든 허물을 휘장으로 감싸서 용해시키고 사랑의 실존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휘장은 하나님의 시은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인간 회복의 뜨거운 생명감이 어려 있는 좌소입니다. 우리는 원죄적 인간입니다. 흰 듯하지만 검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우리들은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사랑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음이 병들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솔로몬의 휘장으로 상징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이 우리들을 가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정죄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사랑에 의하여 사랑이 된 술람미는 자신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휘장으로 가려준 사랑에 의하여 솔로몬의 사랑일 수 있다고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당당하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향해 당당해야 합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언제나 당당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쉴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올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냐”(시 50:8-9)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사랑의 존재이고, 사랑의 변론을 받은, 예정된 구원의 자녀들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것, 곧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우리를 이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리고 그리스도인 된 오늘 우리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확신입니다.“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1-39). 우리를 사랑이게 한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만, 우리가 그의 영원한 사랑이게 하시는 생명력입니다. 이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사랑 안에 있는 사랑의 실존입니다.

(* 편집자 주 : 이종남 목사의 아가서 강해집『사랑 I, II, III』중 일부를 발췌, 이번호부터 연재한다.“아가서는 이 시대를 향한  진정한 사랑의 메시지다. 현대인들은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잃어버린 진정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이 목사는 말한다. 이 목사는 고신대학원,  New Life Bible College, Moorland Bible College에서 공부했고, 경신여고 교목, 기독교전도대학 교수, 금평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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