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한복음 6:5-7).

영적이지만 육신을 가진 인간

요한복음 6장 5-7절에 나오는 큰 무리는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공관복음서의 병행 기사를 보면 무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사흘이나 외딴 곳에 있었고,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막 8:1-3).

무리는 사흘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영혼의 양식을 취했지만 육신은 굶주려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인간의 실존을 설명해 줍니다. 인간은 영혼이 충족되어도 여전히 육신의 배고픔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힘을 얻어도 육신은 배고픔을 느끼고 현실적인 필요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만 택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육신을 위한 음식과 영혼을 위한 음식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고 했던 말씀은 육신을 위한 음식을 부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충만한 삶을 살려면 떡과 말씀 모두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식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요 4:34) 말씀하셨지만, 예수님 역시 육체의 배고픔을 느끼셨고, 우리도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픈 존재임을 아셨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예수님은 무리의 배고픔을 헤아리시고 배불리 먹일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빌립에게 물으신 까닭

예수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이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하신 이유는 열두 제자와 또 오늘 우리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를 드러내 보이고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시험하다'의 헬라어 동사는 '페이라조'입니다. 이 동사는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본문처럼 '시험하다'로 번역할 수 있고 '유혹하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시험은 인간을 단련시키고 정화시키지만, 유혹은 인간을 넘어뜨리고 죄에 빠뜨립니다. 성경에서 시험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유혹의 주체는 사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신앙 성장을 위해 '페이라조'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너무도 인간적인 빌립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6). 우리도 예수님의 질문에 빌립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 저렇게 많은 사람을 먹일 만한 돈이 어디 있고, 그 많은 떡을 살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빌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구체적인 액수를 밝힙니다. 그는 상당히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물어보시자 즉시 계산을 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가난한 공동체였던 그들에게 이백 데나리온이 있을 리 없습니다. 빌립의 계산으로 무리에게 떡을 공급하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사실 빌립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주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의 그런 모습은 마지막 만찬까지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은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게 해달라는 청을 했다가 꾸중을 듣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9).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면, 인간적인 생각에 치우쳐 하나님의 마음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세상과 같지 않습니다. 주님은 아흔아홉 마리 멀쩡한 양을 내버려두고 문제 많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분입니다. 한 시간 일한 품꾼에게 하루치 품삯을 지불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생각은 빌립의 계산처럼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빌립은 지적이고 분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주님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더디게 이루어졌습니다.

질문 속에 답이 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우리'와 '어디서'라는 말 속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의 배를 채워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무리를 배부르게 먹일 궁리를 한다면, 그 궁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서?'라는 질문의 정답은 '우리가 예수님에게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살 수 있는가?'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는 합리적으로 계산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돈에 초점을 맞추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당신에게서 돈 없이 살 수 있다’는 답이 들어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55:1). 요한복음 6:5-7과 이사야서의 '사다'라는 동사는 똑같이 '아고라조'입니다. 예수님께서 값을 치르시고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우리들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똑똑하고 계산적인 빌립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빌립은 주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눈이 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보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제대로 보기까지 오래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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