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맑은 시냇물처럼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이 되고 싶은 시인으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도시 속에 살면서 자연과 분리된 삶을 살아간다. 국민들 70%가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한국의 현실, 더욱이 성장기에 교도소 시설과 비슷한 학교시설에서 교육은 땅을 밟고 자연을 경험할 기회를 박탈해 왔다.

이영 시인은 자연을 사랑한다. 그녀는 집 근처 벙키힐 자연공원(Forest Preseve) 깊숙이 매일 들어가 산책을 한다. 그녀는 봄의 아지랑이 이는 숲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여름날에 활짝 핀 네 잎, 다섯 잎, 심지어 여섯 잎 클로버를 발견하게 하고, 민들레 꽃의 향기를 맡게 한다. 가을날에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낙엽의 자리로 초대하고, 겨울날에 벌거벗은 나목을 만나게 한다.

이영 시인은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투영한다. 민들레는 그에게 하늘을 향한 그리움, 기다림이고 바라봄이다. 가을날 마른 꽃 대궁을 보면서 “남은 사랑 다하여 / 뚜우욱 뚝 낙화해도 좋아라“라고 고백한다. 이는 어머니로서 다할 줄 모르는 사랑, 이웃을 향한 헌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숲속의 바람과 향기가 만나는 그곳”에서 그는 “길 잃은 사슴 한 마리”가 되기도 하고, 산책하다가 만나는 사슴에게는 사슴의 어미가 되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는 진정 자연을 사랑한다. “하늘과 별을 동경하고 / 숲과 바람을 노래하고... / 나무와 새를 즐거워 하고 / 강물과 들꽃을 감사하고...“ 자연은 그녀를 살게 하고 그녀의 마음과 꿈, 신앙이 자라게 하는 원천이다. 「압해도」라는 시는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잘 나타내 준다. 그녀는 자연과 더불어 교감하는 것을 넘어 자연 그 자체이고 싶어한다. 한 자락 바람이고, 아픔 씻기는 강물이고,  들꽃의 노래이고, 모든 것을 받아 주는 땅의 가슴이고, 아픔이 씻기는 비가 되고 싶어 한다.

나는 이영 시인이 노래한 자연과 삶의 성찰을 통해 깊은 산속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맑은 시냇물처럼 나의 영혼이 맑게 씻기는 것을 경험한다. 그녀가 노래하는 자연을 만나면서 나도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듯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영 시인의 시를 읽어 나가는 동안, 그녀가 말하는 시 세계가 성 프란체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처럼 들리기도 하고, 미국의 여류 시인이며 자연적 영성을 노래한 에밀리 디킨슨과 메리 올리버의 시와 연결되는 듯하다. 이 세 사람은 자연을 그들의 형제요 자매로 인식하였고,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인생과 삶을 관조하고, 자연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이 서로 연결된 관계임을 보여주었다.

 

 

2. 늪 지대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상처입은 치유자로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의 삶을 내던져진 존재, 피투(彼投)된 존재라고 하였다. 이영 시인에게 던져진 삶은 너무나 아프고 힘든, 고난과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식구, 친척, 친구 하나 없는 시카고라는 땅에 남겨진 두 살된 뇌성마비 아들과 나, 낮선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일은 장애보다 더 무서웠다.” 이런 삶의 현실은 이렇게 시(詩) 「늦가을」에 투영된다. “내 영혼의 길목 같은 가을 날  / 바람 불고 비가 내리면 / 우수수 단풍마저 지고... / 모든 것이 내려 앉은 그 자리 / 내가 울면 / 하늘도 울어 줍니다.“ 그녀는 서른 한 살에 홀로서기를 해야만 했다. “사방이 막힌 어둠 속에 갇혀 / 몸부림치는 출구를 찾는 / 한 마리 새였다...“

하지만 이영 시인은 주어진 고난의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여 걷고 그러다가 넘어진다. 나는 두 모자의 고통과 아픔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다. 아니 그녀가 겪는 고난과 아픔 그리고 외로움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실상 나의 삶 속에 스며든 아픔과 고난이었고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꼭꼭 숨겨 놓고 덮어 놓았는데 이영 시인은 그것을 펼쳐놓는다. 영국 성공회 신부였고 시인이었던 존 던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가? 묻지 말라"고 하였다. 그 종은 죽은 사람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종이기에... 바로 이영 시인과 아들 태청이가 경험하는 고난과 아픔은 비단 그들만의 것도, 아픔을 겪는 사람들만의 것도 아닌, 아픈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우리를 보듬고 어루만져 준다.

이영 시인은 고난과 아픔의 삶을 통과하면서 고백한다. “고난은 유익이고 축복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가는 아들과 나의 현재의 삶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임을 분명히 깨닫는다. 내 삶을 온전히 맡기는 훈련 속에서 외로움, 슬픔조차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임을 알게 하셨다. 천앙의 뇌성마비가 아니라 천혜의 아름다운 아들, 선물임을 나는 안다.” “아픔을 모르는 사람보다 아무리 아파도 그 고통을 견디는 영혼이 더 아름답다던 친구여.“라고 친구를 그리워하지만 사실 그 친구는 동시에 그녀 자신이다.

 

이제 이영 시인과 태청이의 고난과 상처는 다른 이들을 향한 이해와 사랑으로 승화되었다. 칼 융 그리고 헨리 나우웬 신부가 말하는 “상처입은 치유자”로서 이영 시인은 본인들의 삶의 고난과 상처를 드러내며, 그 상처가 다른 이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함께 아픔을 나누고 보듬고, 삶의 기쁨들을 나누는 치유자가 되어 가고 있다. 진흙탕 같은 고난과 절망의 삶이었지만 그것을 내면으로 침잠케 하여 아름다운 수련을 꽃피우고 있는 것처럼, 고난과 상처가 상처입은 치유자로 그녀를 아름답게 서도록 하고 있다.

 

 

3. 천국의 사냥개에 쫓기어, 하늘나라를 쫓아온 하늘바라기

두 모자가 의자하고 바랄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목마른 갈망들 햇빛에 쏟아내고 / 폭풍우에 힘겨울 땐 고개 숙이며 / 하늘이 주는 대로만 먹고 사는 하늘바라기”였다. 그들은 신앙으로 살아가고자 결단하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힘찬 날개를 달고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느낌표를 찍어 보는 거야... 이제, 이제는 깊고 푸른 시간을 찾아 떠나는 거야” (「신앙인으로」)

이 책에는 이영 시인과 아들 태청이가 신앙인으로 성장, 성숙해 나가는 과정이 그 어느 성인의 삶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다. 성경 통독을 통한 치유와 말씀의 발견, 금식기도를 통한 정화, 과부의 두 닢 동전처럼 “진정한 보석이란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작은 빛”이라며 그들이 받은 보석을 아낌없이 구호를 위하여 봉헌하는 헌신, 즉사(卽死)해야 할 정도의 교통사고에서도 지켜 주시는 하느님의 보호하심, 엘리야의 까마귀를 통한 공급하심, 이웃, 교회,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봉사 등등.  정말로 신앙 성인(聖人)의 기도, 성경 읽기, 묵상, 금식, 봉사, 헌신, 기적 그리고 감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훈련 교재가 필요하다면, 그 모든 것이 내재되어 있고, 산 증인으로서의 실천이 담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영국 성공회 신부인 존 스토트는 프란시스 톰슨의 시를 인용하면서 “천국의 사냥개”가 자기를 쫓아와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아마 그녀의 삶 역시 “천국의 사냥개”에게 쫓겼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하늘바라기가 되어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가운데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나의 인생아 고마워』는 두 살 된 뇌성마미 아들과 함께 가난한 여인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지난 25년을 살아오면서 아픔을 경험하고 감사와 은총에 겨워 기쁘게 부르는 시카고의 “룻”의 노래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을 기록한 증언이며, 신앙을 통한 삶의 승리의 이야기이다.

 

4. 상호연결된 아름다운 세상의 참된 나, 이영으로  

 

현대사회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으로 연결되고, SNS로 연결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면 될수록 더욱 미립자화(微粒子化)되고 분화(分化)된다. 연결은 되는데, 깊은 연결이 되지 않고 더 외로움을 경험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겉포장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신의 약점과 아픔 모습을 숨기려고 가면을 쓰고 포장하면서 표피적 만남에 그치기에 진정한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다. 파커 팔머, 에크하르트 톨 등을 비롯한 현대사상가들, 마틴 셀리그먼 등 현대 긍정심리학자들은 현대인들이 진정한 자아, 참된 나로 바로 서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며, 그로 인해 상호연결된 삶의 기쁨과 공동체의 축제를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영 시인도 몇 년 전 까지 그랬는지 모른다. 자신의 아픔, 삶의 버거움, 외로움 등으로 숨어버리고 싶고, “나는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야 하나?”를 절규하듯 질문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질문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원하시는 소명을 발견해 나가며 그녀 자신이 된다. 파커 J. 파머는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중에서 메이 사튼의 시 「나 이제 내가 되었네」를 인용한다. “나 이제 내가 되었네 / 여러 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 시간이 많이 걸렸네 /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 없어져 /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진정한 나, 참 자아로 바로 설 때 진정한 만남, 상호연결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이영 시인을 만났다. 강점, 열정, 핵심가치와 소명을 찾아 나가는 길고 긴 과정,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정 : Finding Your Sweet Spot)> 프로그램을 통하여 이영 시인은 삶 속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섭리, 그녀를 빚으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가운데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자아는 본인이 고백하는 것처럼 “으깨어진 포도가 빚어내는 맛있는 포도주”요, “깨어진 항아리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보석 같은 빛”이었다. 아니 이런 자아는 이미 그녀의 삶 속에 스며 있었고, 날줄과 씨줄이 되어 삶의 무늬를 엮어 가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프로그램을 통하여 발견하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 세상에 돌아온 것뿐이다.

이영 시인은 그녀가 가진 연약한 사랑으로 놀랍도록 사람들을 연결하는 신비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약점과 부끄러운 모습, 가녀린 삶의 몸짓을 드러내면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런 영혼의 떨림과 몸짓, 사실은 투쟁에 가까운 처절한 헌신의 몸부림을 통하여 사람들과 진정으로 연결되고, 삶의 놀라운 기쁨을 나누는 신부로서 살아가도록 하셨다.

뇌성마미 아들을 키우면서 경험한 온갖 일들,  어린 시절 큰 집 가는 길에 한 번 방문하고 만난 동네 할머니와 나누는 편지, 이웃집 폴란드 할머니와 나누는 「모야코 하네」 등은 참 자아의 이영 시인을 만나게 해준다. 참된 나, 그 누구도 아닌 이영으로서 살아가는 그 모습에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고난과 아픔이 있었지만, 삶은 아름다웠고 놀라운 경이로 가득 차 있다고 노래하는 한 시인, 『내 인생아, 고마워』라고 감사의 찬양을 하는 한 신앙인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된다. ”가난한 들꽃 향“으로 우리를 감싸고 ”, “고통도 슬픔도 맞잡고 춤을 추라! 멈추지 말고 흘러가라!”며 춤을 추는 축제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나는 이영 시인의 『내 인생아, 고마워!』를 통하여, 그리고 그녀를 통하여 우리들 스스로가 참된 나로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참된 나로 돌아올 때 우리들은 진정한 만남으로 연결되며, 너와 나를 넘어선 더 큰 은총의 만남, 사건, 사물을 만나는 경이와 신비를 경험할 것이다. 이영 시인은 우리를 삶의 놀라운 신비로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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