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로 읽는 아가서 강해(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아가서 2:3).

쉼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태양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시간에 지고 가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늘이 있다면 나그네는 감사할 것입니다. 그늘은 삶을 북돋우어 주는 힘입니다. 쉼에는 그늘이 필요합니다. 쉼을 위한 그늘은 팔레스타인 지방이라면 생명과 관계될 만큼 절실한 것입니다. 뙤약볕에서 일해 본 사람은 그늘의 중요성을 실감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해 본 사람은 그곳에서 그늘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요소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나무는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그늘은 쉼을 줍니다. 쉼은 성숙으로 가는 회복의 시간이며 건강한 삶으로 복귀하는 시간입니다.

여인 술람미는 자신의 애인 솔로몬을 사과나무라 하고, 그 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에서의 쉼을 기뻐했습니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라고 말했습니다. 수풀의 그늘은 그들만의 것이어서 쉴 만한 공간을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풀은 가시덤불입니다. 가시덤불이 그늘을 만들지 못하는 가시로 무장한 자기중심적인 인간 집단 곧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세상에는 쉼이 없습니다. 그곳은 경쟁하는 그들만의 것이어서 다른 사람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자기가 만든 그늘을 자기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애입니다. 자기애에는 다른 실존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함께 머물 수 있는 공간 속에 자기만 가두어 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쉼의 공간이 없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병입니다.

솔로몬이 만들어 주는 그늘은 술람미에게는 쉼의 공간입니다. 그녀가 가장 평안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공간입니다. 가장 즐거운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그녀의 삶의 여유이자 꿈의 세계입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삶을 회복할 것입니다. 솔로몬을 위하여 자신을 가꾸는 성숙의 여유를 누릴 것입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감사를 느끼는 풍요의 시간을 향유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영원한 쉼의 그늘입니다. 이 쉼의 그늘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원한 사랑 가운데서만 참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영원한 구원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향으로 피어나 맺힌 열매입니다. 구원을 경험한 가슴은 기쁨과 감격이 뿜어 나오는 활화산입니다.

 

성경에서 그늘은 빛과 어두움을 모두 상징합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시 107:10), “사망의 그늘진 땅”(사 9:2), “애굽의 그늘”(사 30:2),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사 16:3), “어둠과 죽음의 그늘”(눅 1:79)은 어두움의 그늘이고, “주의 날개 그늘”(시 17:8), “전능자의 그늘”(시 91:1), “폭양을 피하는 그늘”(사 25:4), “사과나무 그늘”(아 2:3)은  빛의 그늘입니다. 빛의 그늘은 쉼과 회복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빛의 그늘은 사랑입니다. 쉼과 회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나락에 떨어졌다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눅 15:24)는 선언은 실패한 아들에게 쉼과 회복의 그늘이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자의 그늘(시 91:1)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죄로 죽었던 인간 실존을 본래의 자녀로 회복시키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잔치의 속성은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의 귀환에 대한 기쁨은 사과나무 그늘에 대한 술람미의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사과나무 그늘은 술람미의 오른쪽 그늘입니다(시 121:5)입니다. 더위를 피하는 그늘 되신 여호와이십니다(사 4:6).

우리는 자주 유다가 애굽을 의지한 것처럼 세상이 주는 그늘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유다는 바로의 세력을 그늘 삼아 스스로 강해지려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애굽의 풍요로움을 그늘 삼아 그 흉년을 극복해 보려는 안일한 생각으로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애굽의 매력에 취해 그 그늘에 안주하고픈 욕망을 삭이며 살아갑니다. 그렇지만“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다”(사 30:3)라는 여호와의 경고로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큰 바위 그늘”(사 32:2)이라고 했습니다. 그 그늘에서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고,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유다가 회개하고 여호와 앞에 돌아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여호와에게로 돌아가 그의 그늘에 거해야 합니다.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아모스 5:8),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호세아 14:7)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늘이 지게 하며 그것을 마르게도 하십니다. “머리를 위하여 그늘을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요나 4:6).

이제 우리 스스로 짓고 안주하던 초막 그늘은 다시 뙤약볕에서 혼곤해질 뿐(요나 4:5)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한, 사과나무 그늘에서 심히 기뻐하는 날들을 사랑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쉼과 회복을 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그것은 쉼의 그늘입니다.

* 편집자 주 : 이종남 목사의 아가서 강해집『사랑 I, II, III』일부를 발췌, 연재한다.“아가서는 이 시대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다. 현대인들은 이 메시지를 듣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이 목사는 말한다. 이 목사는 고신대학원,  New Life Bible College, Moorland Bible College에서 공부했고, 경신여고 교목, 기독교전도대학 교수, 금평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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