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 1:5-7).

두 가지 질문

낙원 추방, Ludwig Richter

창세기 서두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실존적인 질문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질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 질문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머물러야 할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제자리를 벗어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제자리를 벗어난 인간을 향한 영원한 화두입니다. 하나님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 마침내 하나님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애달픈 부르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존재로 살아가는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에덴의 동쪽을 향해 걸어가는지를 늘 질문하며 살아야 합니다.

형제 살해, Ludwig Richter

두 번째 질문은 가인에게 주어진 질문입니다. 가인에게는 아벨이라는 아우가 있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는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지만 여호와께서 사람과 제물을 함께 취급하시는 것으로 보아 제물에 담긴 사람의 마음을 읽으셨다고 헤아리는 것이 무리 없어 보입니다.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다 변했습니다. 분노는 시기심으로 이어져 아벨을 죽였습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을 향해 하나님께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4:9)

여호와의 이 질문 역시 영원토록 인류를 향해 던져진 질문입니다. 야곱과 에서, 요셉과 형들, 심지어 예수님과 형제들도 싸웠습니다. 형제 이야기는 배신과 속임수, 질투와 경쟁, 거절과 복수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희생과 용기, 자비와 화해, 사랑과 환대도 들어 있습니다.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후예로 살아갈 수도, 아우를 지키는 자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내 형제가 어디 있는가? 누가 내 형제인가? 나는 형제를 지키는 자인가? 그 질문은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필라델피아(형제애)

신의 성품에 참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베드로 사도는 일곱 가지 덕목을 나열합니다. 그 중 여섯 번째가 형제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서 '필라델피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접두사 '필'은 '~을 좋아하는'이라는 의미입니다. '델포스'는 형제를 의미합니다. 필라델피아는 형제애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형제애와 비슷하게 쓰이는 단어로 '크레스토테스'와 '필랜드로피아'가 있습니다. '크로스토테스'는 선의를 뜻합니다. '필랜드로피아'는 인류에 대한 관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친절을 나타내는 데 적절한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를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형제애와 베드로가 말하는 형제애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필라델피아를 의도적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친절 이상의 심오한 어떤 것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크레스토테스'와 '필랜드로피아', 즉 자선(philanthropy)은 굳이 대상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는 개인적인 관계가 필수적입니다. 형제애란 얼굴을 맞대고,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누가 내 형제인가?”라는 질문에 필라델피아는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다.”라고 답하게 만듭니다. 필라델피아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5-16)라고 말한 것은 필라델피아, 즉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형제애가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열거한 일곱 가지 미덕은 모두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그 일곱 번째가 사랑 즉 '아가페'인데, 굳이 형제애를 여섯 번째 덕목으로 열거한 것은, 두 가지 사랑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필라델피아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가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는 그를 지키는 자입니다.

성령은 피보다 진하다

신약 성경 기자들은 필라델피아라는 단어를 그저 형제처럼 지내야 한다고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보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 간의 관계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형제와 자매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최우선시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은 피보다 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를 부인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34-35).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형제자매라는 새 가족이 제자 공동체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51-53).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의 가정들이 나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은 자기 가족, 혈족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오랜 가족과 씨족들을 꿰뚫으며 곳곳에서 예수님의 새 가정,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형제와 자매들이 된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 유무상통하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기록된 초기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의 형제와 자매들은 서로 사랑하고 돕기는 하지만 재산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새 가족으로서 형제와 자매가 된 초기 교회 공동체는 그런 세상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성령이 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해 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가능함을 보여 주었고, 세상의 빛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가 흐르면서 교회에서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정체성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성령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령은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새로운 영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으며, 그 성령은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15)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정

오늘날 주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가정이라는 공동체 자체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말로만 형제, 자매라고 할 뿐, 실제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형제와 자매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몽상가로 치부됩니다.

우리가 마땅히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가족 됨의 의미를 잃어버림으로써 복음이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와 자매라는 기본적인 정체성을 망각했습니다.

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라면 우리는 교회를 함부로 선택하거나 떠날 수 없습니다. 가족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교회, 나쁜 교회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은 좋아도 나빠도 가족입니다. 교회 간에 경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가족이 되는 것을 포기하거나 다른 식구를 제명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모두의 아버지는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누구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을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막 3:29).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 모독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형제와 자매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을 부인하는 것이고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필라델피아'를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필라델피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형제애를 공급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형제애를 공급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 안에서 "예"가 될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예, 제가 주님 앞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할 것이며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예, 제 옆에 형제로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예"가 되는 것이며 인간 본연의 자리에서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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