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매일 큐티를 하고, 교회 유스그룹에서 찬양팀을 섬기며, 소그룹 리더로 활동하는 것은 목사 아빠의 간절한 희망사항일 뿐임을 공감하는 친구 목사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가장 불만족스러운 부분만 붕어빵처럼 닮은 아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과 걱정이 밀려온다고 했습니다. 어찌 그리 제 생각과 똑같은지요.

유별나고 또래 문화에 호기심 많은 아들이 어느날 머리 염색을 하겠다고 하더랍니다. 무작정 반대하면 반발심만 일으킬 것이고 꽉 막힌 꼰대 아빠라는 소릴 듣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척했답니다. 그 다음에는 귀고리를 하겠다고 하더랍니다. 또 다시 내려놓음이라는 단어를 읊조리며 ‘저것도 한때이지’ 하는 맘으로 허락했답니다. 사실 아이는 엄마가 허락했지 아빠가 허락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문신을 하겠다고 하더랍니다. 참고로 저는 딸아이가 코를 뚫고 나타났을 때 뒤로 자빠질 뻔했습니다. 목회를 여기서 그만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했거늘 감히 몸에 손을 대다니!’ 하는 생각에 화도 나고, ‘이해가 안 가네.  그게 왜 멋있어 보일까?’ 하면서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둘은 격하게 공감하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몇일 동안 눈치 싸움을 한 다음, 아빠는 정 하고 싶으면 아주 작고 흉하지 않을 만큼 해도 좋다고 말했답니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팔뚝 전체와 등 전체에 하고 싶어했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친구 목사는 비장한 각오로 담판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 안 되는지에 대한 질문과 답변, 반론과 재반격. 결국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전쟁으로 비화될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친구 목사는 감정의 스톱 단추를 누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하지 말라는 이유를 더 댈 게 없다. 다만 한 가지. 아빠는 이게 싫어. 네가 나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안했으면 좋겠어.”

궁지에 몰린 어른들은 결국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걸까요?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이유이며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경계와 질서를 지키는 행동을 하는 것이니까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들은 일단 더 생각해 보겠다면서 대학에 갈 때까지 유보하겠다고 했답니다. 전쟁과 가출의 위기는 일단 넘긴 것 같습니다.

관계의 힘이 제때에 작동한 것입니다. 평소 아빠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아들이었다면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서적으로, 공간적으로 아빠를 떠났겠지요. 하지만 그 친구 목사는 평소 아들에게 아빠다움을 보여 주어 크레딧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라고 합니다. 각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꼭 하려고 하고 이에 대해 참견이나 비판받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세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고 그 권위 아래 보호를 받으며 안정감을 찾으려 했던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우리의 아이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교육 내용을 잘 전달하고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까요?

관계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진정한 권위는 내용 자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관계로부터 나옵니다. 관계에서 누리는 평안함과 관계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권위를 형성합니다. 관계의 기본 요소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은 어느 한순간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통해 쌓여가는 것입니다.

사춘기 자녀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요? 맞는 이야기인데도 상대가 반대만 한다고요? 실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 관계의 부재 때문일 수 있습니다. 너무 늦었다고요? 예, 조금 늦었습니다. 하지만 늦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중요하고, 이제부터라도 시작하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신뢰 형성에 해가 되는 언행을 스스로 금지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사랑을 연습해야 합니다. 관계 속에서 존재감을 확립해가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관계는 좋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관계에 기초한 지시와 설득은 강제와 논리에 의한 훈육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자녀들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도 관계 중심 접근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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