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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더불어 해석하는 공동체아, 성경 그리고 분별 (4)
박준형 칼럼니스트  |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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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22  03: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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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근본적인 분별 도구로 인정하기 위해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도 안 되고(문자주의자), 자가당착적으로 해석해 새로운 이단으로 거듭나서도 안된다. 대신 성경을 냉정하고 올바르게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으면서 지혜를 구해야 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34)라는 바울의 고백은 헛되지 않다. 이처럼 인간이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높은 뜻’으로 성경을 읽고 분별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이성적인 행위를 수반한다.

영국의 제임스 패커가 그의 고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말한, “우리의 이성적인 창조주가 당신이 지으신 이성적인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근본 방식은,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고, 이 이성은 우리를 위한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이성이다. 자신들의 처지를 합리화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성경의 문자와 문자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자칭 크리스천 기업인이 발간한 『성경은 경영학 교과서』라는 책은 그 동기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든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함!” 이 대단한 책의 첫 장은 왜 크리스천은 부요하면 안 되는가 하는 강변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형통하고 성공하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여호수아 1장 8절을 보면 된다.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말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행하라!” 이 저자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재정을 책임지는 분이시고, 성경은 재정관리 지침서이다. 우리는 성경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세속적인 표현을 빌어 말하면, “사업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대로 안 하기 때문이다, 이 멍청아!”가 된다.

이 책의 긴 이야기를 줄이면, 지금 사업에 죽을 쑤는 자들은 성경이 시키는 대로 해서 사업에 성공하라는 것이다. 모든 노하우가 바로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업가의 눈에는 성경의 모든 구절이 사업 지침으로만 보일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하지만 이들의 ‘경영학적인’ 눈에 들어오지 않는, 숨어 있는 성경 구절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가서의 정의로우신 하나님. 욥기에서 이유 없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선지자의 끊임없는 고난과 죽음. 호세야 선지자의 비참한 결혼: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 1:2). 누가복음에서 마리아를 통해 그려낸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명(수태고지)에 과연 사업가적인 미션이 포함되었던가?

예수님 말씀의 정수인 산상수훈과 세상의 경영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팬인가 제자인가』의 카일 아이들만이 말한, 요한복음 3장 16절은 반드시 누가복음 9장 23절과 같이 읽어야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즉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반드시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과 경영학의 관계는?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만화경의 조그만 구멍에 한쪽 눈을 맞추고 화면을 넘기다 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중국집에서 후식으로 주는 ‘행운의 쿠키’와 같이 심심풀이로 꺼내보는 게 아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우리 자신을 모두 맡기는 것이다. 글자를 간 보고 맛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경이 우리를 통째로 삼키도록 우리의 목적 자체를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고, 포기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야 한다. 그래야 자간과 문맥이 읽히고, 그래야 하나님의 크고 높은 진리가 서서히 그 위엄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 삶의 실재가 된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은, 성경을 우리가 읽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도리어 우리가 읽혀진다는 미스터리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한 ‘책을 제대로 먹는 것’(계 10:8-11)의 비유와 다름이 없다.

따라서 그 어떤 문자적인 오류에도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성경 이해나 믿음을 과신하지 하지 말아야 한다. “저는 하나님을 모르면서 아는 체했습니다”(욥 42:3).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같이 읽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성경이 지난 2천 년 간 건재했던 이유는, 성경이 지워지지 않는 철갑 잉크로 쓰여져서가 아니라, 성경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처한 시간과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게 읽혀졌기 때문이고, 공동체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전히 동일한 문자의 총합에 불과하고, 성경의 유연성과 역동성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영역에 속하나, 실질적으로 성령의 가르침에 열려 있는 ‘해석적인 공동체(hermeneutical community)’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건재할 수 있었다.

‘해석’ 혹은 ‘공동체’라는 말이 쉬운 말은 아니지만(아니 위험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말도 아니다. 지난 세월 동안 한국교회에서의 ‘성경 해석’은 목사나 신학자들의 몫이었고, 신자들은 이들의 말을 믿고 따르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결과가 어땠는가?

소위 분별을 공부하는 학생이고 신앙의 성숙을 갈망하는 신자라면, 기존의 “나는 가르치고 너희는 듣고”라는 일방적이고 비인격적인 패러다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바란다. 목사라는 직분은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그렇다고 목사 직분의 권위를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목사건 신도건 성경을 제대로 공부할 때 성경을 제대로 알게 된다(문제는, 목사나 신도들이 늘 바쁘다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는 목사가 교인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성도와 같이 공부하는 곳이다. 성경 해석의 주체는 목사가 아니라 성령임을 잊어선 안 된다. 이렇게 단상 위의 목사가 신자와 같이 학생의 신분으로 내려올 때 해석하고, 해석되는 수평적인 공동체가 탄생한다.

이런 길이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 길이 맞다, 라고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공동체를 위해서,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한 성경 이해가 아니라, 개인의 영역으로 성경 이해가 국한될 때 성경은 분별의 범위를 넘어 공동선을 파괴하는, 고삐 풀린 짐승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성경의 고린도 교회가 역사 속의 안타까운 사연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가 사는 교회/사회 전체의 문제로 비화된다고 상상해 보라.

완전한 공동체는 없다. 그러나 성경을 더불어 해석하는 공동체가 불완전하고 불편해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이 즐거워하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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