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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안다면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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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29  04: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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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생명의 면류관

야고보 사도는 1:12에서 인내의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결과를 강조합니다. 먼저 인내하는 성도는 진짜 복이 있는 사람,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12절의 맨 앞에 나오는 단어는 '복 있는'(마카리오스)입니다. 똑같은 단어로 시작하는 문장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입니다. 여기에서 선언되고 있는 복은 종말론적일 뿐 아니라 현재적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천국은 장차 온전히 주어질 것임과 동시에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내로 시험을 견디고 나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은 장차 주어질 것임과 동시에 지금 주어진 실체입니다.

이 '복'이 복을 받는 사람, 곧 인내하는 사람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말은 물론 인내함으로 장차 받게 될 영광스런 결과를 가리킵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표현은 당시 로마의 운동 경기에서 이긴 자가 받는 월계관처럼 잠시 있다가 썩어 없어지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영원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영원불변할 뿐 아니라 ,그것이 곧 생명의 면류관을 얻은 사람 자신입니다. 영광의 내용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사람, 인내하여 온전해진 사람, 그 사람 자신이 곧 영광의 메달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영원토록 누림이 곧 그가 받은 금메달이며 더욱 더 온전해질 영원한 생명의 증거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복'은 인내를 통해 변화되어, 그 변화의 절정과 완성으로서 받게 될 영원한 생명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 삶을 살게 될 '그 자신'이 바로 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다'는 것은 복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선언입니다. 그가 받아 누리는 생명이 곧 면류관입니다. 영광 그 자체입니다. 그 영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1:12의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는 '검증이 끝난 후에'라는 의미입니다. '진짜가 된 후에' 혹은 '진짜임이, 혹은 참된 가치가 드러난 후에'(도키모스 게노메노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가치가 시험 과정을 통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검증된 후에 우리는 달라집니다. 용서할 수 없었는데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인색했는데, 긍휼이 넘쳐 베풀게 됩니다. 급하고 사납기까지 했는데 온유해집니다. 거짓을 말하면 양심에 가책이 되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진리에 목말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를 얻는 것이 전부였는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검증의 과정을 겪으면서, 생명에 속한 영광스런 성품들이 하나하나 드러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생명의 면류관은 이미 우리 속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종말에 주님에게 수여받는 금메달이나 월계관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나날이 온전해질 영광스런 선물입니다.

신앙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일이 오늘과 다르고 내년이 올해와 달라야 합니다.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달라집니다. 변화됩니다. 생명의 향기가 모든 것을 바꾸고 이기게 합니다. 생명을 가진 자의 인내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생생한 매력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생명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생명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흥미롭게도 12절의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는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과 병행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원래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은혜와 율법을 주신 그분의 백성을 뜻하는 유대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관용적인 칭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이란, 하나님께 언약적인 사랑을 받은 자들이고, 그 언약적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시험을 통해 옳다 인정하심을 받았습니다. 그 검증을 통해 스스로 진짜임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복된 약속은 지금 여기 살아 있고 성장하는 영적 생명입니다. 그들은 시험의 고통 가운데서 더욱 뜨겁게 살아 성장하는 영적 생명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 언약적이고 신실한 사랑을 받고, 그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곧 사랑 안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고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그들 역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인내하게 합니다. 사랑은 생명을 낳고 기릅니다. 사랑의 완성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배설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후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까지 소유하거나 누려왔던 모든 것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자 이전에 소중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사도 바울과 같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 그 누구도 이전에 가졌던 재물을 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재물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것을 나누었습니다(행 2~4장 참조).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와 같은 깨달음을 가진 자들의 삶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교부들 가운데에도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수도원을 세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중세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나 아미시 공동체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과 복음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촛불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복음을 소유하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의 다른 것들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그런 예수님과 복음을 믿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소유한 그리스도와 복음의 가치를 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 많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돈이 맹위를 떨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선언하기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도 세상의 다른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단번에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역사가 우리를 변하게 할 것이며 행동하게 할 것이며, 마침내 세상의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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