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한국교회 부패의 원인이 된 바울의 '칭의론'

풀러 신학대 교수인 김세윤 박사는 한 사경회를 통해 바울의 '칭의론'이 한국교회 부패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고 탄식했습니다. 그에 관한 기사를 인용하겠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바울의 칭의론(롬 1:17)을 근거로 비판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바울의 칭의론인 “이신칭의(以信稱義)”(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는 종교개혁 후 개신교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교리였다.’

종교 개혁의 기치 중 '오직 믿음'(Sola fide)의 근거가 된 '이신칭의'는 개신교 신학의 근본 교리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천국이 믿음으로 가는 나라라는 것을 다 압니다.

‘김세윤 박사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개혁의 근거가 되었던 바울의 칭의론이 한국교회가 부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바울의 칭의론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교인들에게 믿으면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강조했고, 이는 행위 없는 믿음을 갖게 했다. 김 박사는 “기독교인들은 사기를 치거나, 탈세해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독교인들은 '개독' 이니 '먹사'라는 소리를 들어도 싸다"고 했다.’

‘김세윤 박사는 한국교회가 왜곡한 칭의론은 잘못된 구원론을 가져왔다고 했다. 김 박사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구원론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영리'다. 사영리를 보면 사람들에게 죽으면 지옥에 간다고 겁박해서 예수를 믿게 한다. 그리고 예수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나 스스로 믿겠다는 의지 없이, 그리스도라고 말만 하면 그 순간 구원받는다고 한다. 김 박사는 "사영리는 구원을 왜곡하고 있다. 이런 구원론을 가진 한국교회는 사실상 구원파와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김 박사는 "행위 없이 믿음으로 구원받거나, 한 번 받은 구원은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교회가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생활은 주일 성수, 헌금, 전도이다. 이 세 가지를 강요하기 위해 “사후 상급” 교리를 만들었다. 그는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을 잘하면 천국에서 큰 상을 받고, 잘못하면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강요했다. 이것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파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귀중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 박사가 말하고 있는 '주일성수', '헌금'(특히 십일조), '전도'(영혼 구원)는 한국교회에서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을 교회에 필요한 일꾼으로 만들기에는 좋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가치관으로 오염시켰습니다.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와 왜곡된 '구원관', 그리고 모순적인 '신앙'은 잘못된 복음 이해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와 같은 잘못된 관행이 면면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한국교회가 인간의 욕망에 휘둘리는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왜곡된 구원관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영혼 구원'이 얼마나 잘못된 복음 이해인가를 알게 해줍니다. 또한 우리의 전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세상과 같지 않으십니다. 정욕을 좇는 우리들과도 같지 않으십니다. 본문은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어인 '그'는 하나님을 일컫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뜻을 좇으신 것은 14절에서 각 사람이 자기 욕심에 미혹되었다는 기사와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은 정욕을 품어 시험에 들었고, 죄를 지었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품으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지으신바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두 구절의 주어가 다릅니다. 14절의 주어는 '각 사람'이고, 18절의 주어는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낳는다는 의미의 동사 '아포쿠에오'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품은 뜻과 낳은 대상이 다릅니다. 사람은 정욕을 품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시험에 들고, 곧 죄를 낳고, 사망을 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두 구절의 대조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죄와 사망’과 대비되는 '의와 생명'을 낳으셔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품으셔서 우리를 낳으셨는데, "진리의 말씀으로"(로고이 알레세이아스) 낳으셨습니다. 대조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의와 생명'을 낳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의 열매, 혹은 결과로 나타나야 하는 '의와 생명'이 실제로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심을 입은 '우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대비는 윤리적, 도덕적 이원론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정욕을 품어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 시험에 들고 죄를 짓고 사망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정욕을 바로 다스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 의를 행하여 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원하는 대조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정욕에 휘둘리는 모습과,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사람을 새롭게 낳으시는 모습입니다. 사람 자신의 실패와 하나님의 새 생명의 역사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뜻을 따라가면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야고보서는 '행위를 종용하는' 교훈집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야고보서는 단순히 행위만 강조하는 서신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죄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이 의와 생명을 추구해야 한다든지, 그 의와 생명의 길을 실천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께서 뜻을 품으셨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분의 창조 의지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섭리이며, 그분의 주권적 구원의 의지입니다. 그분께서 '품으신 뜻'의 결과로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곧 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의지. 그분의 뜻'의 나타남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죄와 죽음의 길을 피해 의와 생명의 길을 가고, 열매 맺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재창조

18절은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신약에서는 '복음'을 의미하는 관용구입니다(고후 6:7, 엡 1:18, 골 1:5, 딤후 2:15, 벧전 1:25) 또한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는 표현은 초기 기독교나 후기 기독교적 자료들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에서 18절은 복음과 재창조를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창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말씀'으로 지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반면 18절의 '우리' 곧 1:1의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로 언급된 새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으로 태어났습니다. 첫 번째 창조된 인류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셨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지만, 종말에 새롭게 창조하신 그분의 백성들은 '진리의 말씀' 곧 복음으로 태어났습니다. '첫 열매'(아파르게)라는 표현 역시 신약에서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임을 고려해야 합니다(살후 2:13, 롬 16:5, 고전 15:20, 계 14:4). 또한 로마서 8:15-25의 경우처럼, 창조의 이미지는 재창조의 비전 속에서 얼마든지 구속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18절은 창조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되, 하나님 백성을 다시 창조하는, 구속을 통한 재창조를 언급하는 대목이라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18절이 재창조를 의미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21절의 해석과 2장에서 거론되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셔서,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 곧 복음으로 당신의 백성을 낳으셨습니다. 즉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통해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14-15절에서 경고한 시험과 죄와 사망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그런 길로 가지 않을 수 있는 영적 생명을 가진 종말의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것입니다. 18절은 하나님의 자신의 뜻, 곧 그분의 구원 의지에 기초한 구원론을 담대히 선포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이것이 야고보 사도가 선언한 구원 사건이며 재창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신 그분의 백성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주시는 하나님

야고보 사도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우선되는 기능은 '받는 것'입니다. 입이 음식을 받고, 귀가 소리를 듣듯,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은혜들을 받는 수납 기관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입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야고보 사도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받고, 받은 것을 깨닫고 누리면,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두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모든 풍성한 선물들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믿음이 적으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의 것을 먼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는 것입니다. 받아야 삽니다. 받을 때, 두 마음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으로 받는 것, 이것이 야고보 사도가 소개하는 영적인 삶, 행위가 있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의와 생명의 열매가 되어야 하는 우리

야고보 사도를 통해, 구원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 받았다면 '의와 생명'이 우리의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여기사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일은 우리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영혼 구령'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 방법도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처럼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의와 생명의 열매가 되어, 그들에게 그 열매인 우리 자신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김세윤 박사는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바울의 칭의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김 박사는 "칭의는 죄인이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일치한다."고 했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종말까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산상수훈(마 5~7장)을 행하는 것이다. 김 박사는 "바울이 말한 칭의의 원래 의미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며, 이것이 한국교회를 개혁하는 길이다"고 했다.’

김 교수의 말은 야고보 사도가 18절에서 한 말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그분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의와 생명의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 길에서 우리의 뜻이 실패로 드러나는 것을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락한 심령이며 연약한 존재인 우리는 욕심에 미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강력한 힘으로 우리들을 몰아붙입니다. 세상의 파도는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품으시고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