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저널
> 오피니언 > 칼럼 | 소망의샘
먼 나라가 어딘가요?누가복음 15:11-20
허영진 목사  |  revhuh@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6.06  06:47:43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세 쌍둥이가 출생 직후 헤어졌다가 23년 후에 다시 만난 기구한 사연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적이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가출한 아들과 아버지가 여러 해 지난 후 극적으로 다시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이민자들도 먼 나라에 온 사람들입니다. 물론 탕자처럼 재산을 허비하거나 방탕생활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혀 상관이 없다고 안심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먼 나라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단 한 걸음이라도” 벗어난 곳이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불신하는 태도에서 먼 나라는 시작됩니다. 이기적 소유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부터가 먼 나라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던 큰아들도 실은 먼 나라에 살고 있었습니다. 먼 나라는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는 심령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먼 나라에 있지 않습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먼 나라에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 그만 인생사표 내시고 유산을 미리 주세요. 내 배짱대로 한 번 살아보게요.” 이것이 나의 숨겨진 심보는 아닙니까?

참견 좀 하지 말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세요.” 이것이 내 솔직한 심정은 아닙니까? “나도 남들처럼 좀 즐기며 살아봅시다. 세상 쾌락 좀 누려봅시다.” 이게 내 속셈은 아닙니까?

“나도 감투 하나 씁시다.” 이런 야심은 없습니까? 지위에 따르는 책임은 몰라라 하고 권리만 찾는다면 탕자나 다름없습니다.

“나도 인기 스타 한 번 돼봐야겠소.” 이것이 내 본심은 아닙니까? 우리 속에는 인기와 명성을 탐하는 본능적 욕구가 있습니다. 인정받는 것이 삶의 동기라면 내가 바로 작은 아들과 한 족속인 것입니다.

“어차피 내 것이 될 재산인데 한꺼번에 다 줘요.” 이것이 내 욕심은 아닙니까? 얼마나 많이 버느냐로 성공의 척도를 삼기 쉽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사업이나 직장에서 먼 나라를 헤매며 성공을 찾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달라.”고 만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종처럼 부립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겠다면서 남을 용서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의를 이루기보다 부자 되게 해달라고 조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목적을 먼저 이루게 해달라고 매달립니다. 다른 사람 지옥 가지 않게 돕기보다, 나를 천당 보내달라고 떼씁니다.

“비참해지는 법”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자신만 생각하고 말하라. 가능한 한 ‘나’라는 말을 많이 써라. 남의 의견을 끝없이 견제하라. 남들의 평판에 신경을 곤두세워라. 의심하라. 시기 질투하라. 사소한 일에 민감하라. 비평을 용납하지 말라. 남을 믿지 말고 자신만 믿어라. 배려와 존경을 강요하라. 주장을 무조건 관철시켜라. 베푼 은혜에 감사하지 않으면 삐쳐라. 남 도와준 일을 결코 잊지 말라. 가능한 한 의무를 축소하고, 남 좋은 일은 하지 마라.”

먼 나라는 실패와 좌절의 땅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면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립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못하고 그의 뜻을 이루지도 못합니다. 인생의 으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삶은 남에게 유익 대신 장애와 해가 될 뿐입니다. 자기중심의 삶으로 성공, 명성, 지위를 얻고 세상 쾌락을 누릴 수 있지만, 영혼은 황폐해지고 맙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면 쾌락과 정욕의 종이 되고, 맡겨진 모든 것의 충성된 청지기가 될 수 없습니다.

먼 나라를 떠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탕자는 어리석고, 감사할 줄 모르고, 이기적이고, 미숙하며 자기 파괴적인 젊은이였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잘한 일은 있습니다. 그는 먼 나라의 굶주림과 고독 속에서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잘못된 길을 택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직했고 사람도 사회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기생충 같았던 그가 쓸모 있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달라.”고만 하며 가출했던 그가 “품꾼으로 써 달라.”고 부탁할 결심을 하는 순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허영진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Dictionary.com, 2019 올해의 단어 “existential”
2
오해
3
기독교 영화 '오버커머' 브라질에서 2위 기록
4
크리스마스 퍼레이드와 윈터 퍼레이드
5
런던 브리지 테러범은 가석방 중인 테러 전과자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5235 N. Elston Ave., Chicago, IL. 60630  |  Tel: (773)777-7779  |  Fax: (773)777-0004  |  청소년보호책임자 : SAMUEL D PARK
Copyright © 2013 The Korean Christian Journal. All rights reserved. mail to kcj@kcj777.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