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3-24).

예배의 기준

요한복음 4:23-24은 신약시대의 참다운 예배에 관한 예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위해,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는 말씀을 교회 주보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개역성경에는 “영과 진리” 대신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배할 때 정성을 다하고 엄숙하게 드리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웠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그 본래의 의미를 왜곡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된장찌개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해 주일마다 정성스레 된장찌개를 끓여 드렸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김치찌개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허무한가? 아무리 정성과 노력을 다해도 하나님의 뜻과 다르면 하나님께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기에, 그분의 뜻을 따라야만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즉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며 기준이기에, 여기에 맞추어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

요한복음 4:24의 “예배할지니라”는 “예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어로 “must”로 표현되어 있을 만큼, 반드시 그렇게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영과 진리에 대한 예배를 정확히 알고 이해해야만 한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예배할 때”를 언급하시며, 참된 예배는 어떤 장소에서 행해지는 희생제사가 아니라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가르쳐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대속 제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기에, 더 이상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가 필요치 않고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고 하며, 당시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할례파들을 향해 성도의 참다운 특징들을 말했다. 참다운 성도는 첫째, 성령으로 봉사(예배)하는 자이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이며,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이다. 바울이 언급한 “성령으로 봉사하며”는 헬라어 원어성경에선 라트레우오(latreuō, 하나님께 봉사하다, 즉 종교적인 경의를 표하다, 섬기다, 예배하다)로 “성령으로 예배하며”를 뜻한다. KJV 영어성경에는 “worship God in the spirit,” ESV에는 “worship by the Spirit of God”로 번역되어 있다. 즉 참다운 성도는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를 뜻한다.

칼빈의 예배 핵심 역시 성령의 임재였다. 그는 언제나 예배를 시작하기 전과 성경을 낭독하기 전, 그리고 성찬을 집례하기 전에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다. 예배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초대교회 때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시편을 통한 예배를 드리고 강조했다. 시편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이다. 즉, 성령께서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부흥과 예배에 관련하여,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부흥』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을수록 예배는 형식화되었다. 반면 신앙이 회복될수록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었다.”고 말했다. 예배에 형식이 필요하지만, 예배 형태가 형식적이고 의식적이 된다면, 성령의 역사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예배는 형식적이 되고 영적 침체기에 빠져들지만, 부흥이 일어나면 성령께 속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쇠퇴하는 20세기 영국교회들을 향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예배에서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참고로, 2005년 England Church Censu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사람이 전체 인구의 71%였지만, 실제로 주일마다 교회 나간 사람은 1979년에는 12%, 1989년에는 10%, 2005년에는 6.3%로 계속 감소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교회에서 부흥이 떠나면 성가대를 강조합니다. 돈을 주고 성가대를 사 오기도 합니다.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아! 찬양 좋았어,라고 평가합니다. 성가대가 성도들을 위해 노래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만날 생각도 안 합니다. (...) 더 나아가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습니다. 어느 한 시점을 향해 모든 일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마쳐야 하는지 모두 짜여져 있습니다. (...)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 순서지에 적힌 대로 하라고 종용합니다. 11시에 시작합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한 다음 12시에 축도를 합니다. (...)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이처럼 묶어 놓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는 당시 영국교회만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형식적이지 않았다. 성령에 의해 예배가 드려졌기 때문에 즉흥성이 있었고, 사람들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배가 형식적이 되면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게 된다. 형식적인 예배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와는 거리가 멀다.

존 파이퍼 목사도 그의 책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예배의 의식적인 부분이 하나님께 의미가 없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배는 절하고, 손을 들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암송하고, 설교하고, 먹고, 정결하게 하는 의식들”이라며, 파이퍼 목사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헛된 일이 될 수 있다.”라고 우려한다.

성령에 의한 예배는 저절로 드려지지 않는다. 그런 것이라면, 칼빈이 예배 중에 성령의 임재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세 번이나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배의 형식과 의식이 성령님보다 우선할 수 없다. 성경은 예배의 순서대로 예배하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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