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4:7-8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뇌가 활동하면 살아 있다고 하고, 반면에 이 세 현상이 모두 정지되면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생명과 사망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삶과 죽음을 생물학적으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죽음을 의식의 정지나 영육의 분리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해방으로 이해했고 귀향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맞을 때 “돌아간다.”는 함축성 있는 동사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을 나그네로 보고 죽음을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해방으로 본 우리 선조들의 사생관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새로운 시작으로 이해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은 사도 바울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글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죽음은 분명히 끝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서 기다리는, 보다 좋은 삶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죽음 너머의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5).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해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6-8).

바울은 몸을 떠나는 죽음이야말로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거하는 축복의 관문이라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전13:12)면서, 죽음 너머의 확실하고 복된 생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승리자의 결승점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영광의 개선문으로 묘사합니다. 바울의 유언은 문자 그대로 개선장군의 승전보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 나는 이겼다. 이제 승리의 면류관이 내 머리에 씌워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합니까? 사명을 완수한 자의 자세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나는 달려갈 길을 마쳤다. 주어진 사명을 모두 감당했다.” 죽음 앞에서 우리도 이렇게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지킨 자의 자세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선언입니까? 무엇이나 끝까지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 중에도 믿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믿음에서 떨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경우에서 성도를 향한 사탄의 공략이 얼마나 악랄한 것인가를 생생하게 봅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참된 성도는 믿음을 지킨 자의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죽음을 당당하게 맞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영원한 영광이 보장된 자의 자세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의의 면류관밖에 없다.” 얼마나 굉장한 선언입니까? 내세를 향해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단지 공포와 절망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의의 면류관을 환상으로 보며 오히려 기쁘게 죽음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소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마지막 가는 길에 이 확신을 유언으로 남길 수 있다면 우리의 장례식은 결코 슬픔과 절망으로 기록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유언이 우리 모두의 유언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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