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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과 대야의 정치학주님의 마지막 선택은 섬김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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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01  01: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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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한복음 13:1-17).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만찬의 자리에서 그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후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갑작스런 행동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거부해보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제 마지막 수업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신 것입니다. 그분이 선택한 것은 바로 섬김이었습니다. ‘너희가 다른 것은 다 잊을지라도 이것 하나만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마지막 선택은 섬김이었습니다.

모든 나라들은 깃발을 휘날립니다. 깃발은 나라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도 깃발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깃발은 세상의 깃발과는 달랐습니다. 이 나라의 깃발은 여물통, 수건과 대야, 가시, 십자가, 무덤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세 가지 상징이 나옵니다. 수건과 대야, 십자가 그리고 빈 무덤이 그것입니다. 수건과 대야는 가장 먼저 나오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발적으로 수건과 대야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사역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처형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을 나타내는, 로마의 가혹한 상징입니다. 빈 무덤은 하나님의 마지막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패배시키신다는 상징입니다.

수건과 대야는 종의 도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하인의 도구를 사용하셨습니다. 왕을 상징하는 홀과 왕관과 백마 대신 예수님은 바닥에 섬김의 도구들을 놓으셨습니다. 팔레스타인 문화에서는 손님이 의자에 기대어 식사하는 동안 손님의 발을 그 집의 하인이 씻겨 주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발을 씻겨달라고 요구할 권리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십니다. 섬김을 요구하는 대신 섬기십니다.

발을 씻기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고개를 숙이고 더러운 발을 대면해야 합니다. 먼지와 진흙이 묻은 발을 만져야 합니다. 보통 주인은 얼굴과 손은 스스로 씻지만 더러운 발은 씻지 않습니다.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몸을 숙이고 더러운 일을 몸소 하십니다.

수건과 대야는 샬롬의 도구요 매개체라고 불려왔습니다. 이는 공허한 상징이 아닙니다. 이는 무언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수단입니다. 도구는 우리의 직업을 규정합니다. 수건과 대야는 종의 도구입니다. 이런 도구들은 우리를 낮은 자리에 두고, 다른 사람들을 높은 자리에 올리는 일을 합니다. 이런 단순한 행동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오래된 사회적 계층구조를 뒤엎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겨 주면, 주인과 종의 구분이 사라집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면 ‘모두 함께’ 그분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모두 함께’라는 말을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결핍의 세상에서 경쟁은 불가피합니다. ‘모두 함께’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모두가 만족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풍요함 속에서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모든 것에 다함이 없고 부족함이 없다면 우리는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섬김은 하나님의 풍요함 속으로 들어가서 그분의 풍요함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관문입니다.

수건과 대야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삼 년간 수건과 대야를 사용하셨고, 바리새인들처럼 어떤 이들을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대야는 포용적인 사랑의 대야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들을 평등의 나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무대를 제공한 것은 바로 이 수건과 대야의 섬김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수건과 대야의 섬김에 대해 악의 세력이 보여 주는 자연스런 반응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수건과 대야 사역을 없애기 위한 권세 있는 자들의 폭력적인 도구였습니다. 수건과 대야가 없었다면 십자가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미 수건과 대야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부자들을 괴롭히셨습니다. 그분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고, 이삭을 잘랐습니다. 죄인들과 식사하고, 세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칭하고, 죄를 용서하심으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셨습니다. 그분은 구전 율법을 범하고 비난하셨습니다. 그분은 창녀의 기름 부음을 환영하셨습니다. 공개적으로 여인들과 함께 여행하셨습니다. 비유로 종교지도자들을 공격하셨습니다. 이방인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셨습니다. 무력한 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나환자를 만지셨습니다. 이방인의 집에도 들어가셨습니다. 거룩한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종교적인 행동이라고 생각되던 거의 모든 것에 도전하셨습니다. 그분은 경건한 자들의 완고한 생각들을 뒤집으셨습니다. 사회적 관습과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대야와 수건을 사용하여 무력한 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이런 일탈적인 행동이 죽음을 초래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당국의 괴롭힘과 죽음의 위협도 그분의 포용적인 사랑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행동은 견고한 세력을 위협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은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요, 이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요 11:48)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에 기소한 내용은 대부분 거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새로운 가르침이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깨고 있다고 유대 지도자들이 생각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로마도 팔레스타인 지역 통치를 힘들게 하는 소요가 일어날까봐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손을 맞잡고 그분을 처형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분은 정치적 봉기를 꾀한 바라바보다 더 위험했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매단 꼬리표는 그분의 왕으로서의 정치적인 위협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모범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15). 예수님은 우리들도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수건과 대야의 길에 동참하는 것을 환영하십니다. 그분의 초청은 종교적인 행위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찬식을 “나를 기념하여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그것을 기념으로 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섬김의 삶은 의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분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본을 따라, 그분이 우리를 깨끗이 하듯 우리도 섬기고 용서하며, 다른 사람들을 씻기는 삶을 살도록 초청하십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분의 나라의 일을 행함으로써 그분을 따르도록, 참 주인이신 그분이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행위는 하나가 됩니다.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요 1:1).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에 비교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눅 6:46). 그분은 율법사에게, 가장 큰 계명을 행하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눅 10:28).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눅 10:37). 적극적인 수건과 대야 사역에로의 부르심이 복음서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수건과 대야 사역은 십자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수건과 대야의 사역을 실천하는 사람은 정직해야 합니다.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섬김의 길을 갈 때, 이 땅 위에 그분의 나라가 확장되고 그분의 영광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간결하고 분명합니다. 그러나 복음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복음에 물을 탑니다. 복음을 희석시켜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전적인 순종을 거부합니다. 진리의 우회로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단순합니다. 그분은 저녁 식사 시간을 이용한 간단한 가르침으로 하나님 나라의 정치학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치학은 섬김이라는 단어로 요약됩니다.

우리는 낮아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업신여기고,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착취하는 곳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그래도, 그러지 말아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부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차별이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여야 할 교회가 잃은 것 중 하나가 수건과 대야의 정치학입니다. 예수님이 몸소 가르치신 정치학입니다. 우리는 그걸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뜻을 따라 진정한 섬김으로 당신의 나라를 확장할 제자를 기다리십니다.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작은 자들을 주인으로 섬기는 제자를 찾으십니다. “나를 따르라!” 주님의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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