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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사는 인생
곽성환 목사  |  PMI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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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15  02: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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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울긋불긋하게 변하는 나뭇잎의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바람따라 뒹굴다 어디론가 사라지며 남긴 쓸쓸함 때문일 것입니다. 열매의 풍성함과 추수의 즐거움이 감사와 나눔의 마음을 자극한다면, 빈자리가 남긴 쓸쓸함은 사색의 문을 열어 주고 소중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가을은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도 철학자나 시인으로 만들어 주는 인생 학교 같다고나 할까요? 새삼스럽게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저것은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영영한 이별일까.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입 한 입 베어 먹을 때마다 줄어드는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아무리 먹어도 그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줄지 않는 아이스크림이라면 아까워하지도 않고 어느 순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겠지요. 먹어보면 별거 아닌데 쉽게 먹을 수 없기에 우리는 간절히 먹어보려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유한한 모든 것들은 존재의 덧없음과 더불어 소중함도 느끼게 해줍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많이 사랑할 걸. 소중히 다루며 오래오래 바라볼 걸. 태어나서 자라고 치열하게 살며 열매를 맺다가 수명을 다해 사라지는 것. 이 땅의 모든 생물들이 예외없이 겪는 일생입니다. 늙거나 병들거나 예기치 않은 사고이거나 등등. 그 구체적인 과정은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과정을 통하든 모두 내 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왔다가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도 흔적이 남는데 하물며 한 인간이 왔다 간 자리에 남은 것이 없겠습니까?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주고 떠납니다. 낙엽은 불씨 또는 거름으로 자신을 주고 갑니다. 어떤 이는 재산을 남겨 주고 어떤 이는 감동을 남겨 주고 떠납니다. 그들이 주고 간 것들은 남겨진 이들의 삶 어딘가에 남아 있습니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리움이 남고, 장기를 기증받은 사람에겐 그 사람의 생명이 남습니다.

사실 우리의 현재는 떠난 이들이 남겨준 것들에 의해 유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과 식물이 죽음으로 남긴 그들의 몸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인간다운 삶을 삽니다. 그들이 죽어야 우리가 사는 것이지요. 부모 세대는 재산과 가치관을 남겨 줌으로 자녀 세대의 생존에 기여합니다. 심지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은 어린 아이도 우리에게 ‘신은 정말 선하고 의로운가?’라는 질문을 남겨 줍니다. 거동하지 못한 채 수년 동안 뇌사 상태로 있다가 호흡이 멈춘 중증 환자는 생명의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인간답게 살고 죽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숙제를 남겨 줍니다.

우리는 그 질문과 숙제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삶에 대한 풍성한 깨달음을 얻게 되고, 정신세계와 영의 세계의 신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먼저 간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존재했던 흔적으로 인해 우리가 ‘삶’을 누리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슬픈 죽음은 있을지언정 무의미한 죽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올 것입니다. 먼저 간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머물다 간 시간과 공간의 흔적도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 누군가에 의해 사용될 것입니다. 그 누군가는 나로 인해 얼마 동안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참 감사합니다. 내 죽음이 쓰일 수 있어서말입니다.

욕심을 내봅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기왕이면 좋은 것을 남겨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밑거름이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에 관해 자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것은 내 몫이 아니라 내 흔적을 가져다 사용하는 사람들의 몫이니까요. 나는 그저 누군가가 남겨 내게까지 주어진 그 유산을 잘 사용하고 나를 풍성하게 하는 데 관심을 쏟으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 내게 주어진 것들과 사람들을 더 자세히 살피고 경험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마음을 쏟기로 했습니다. 그 중에는 2천 년 전에 왔다 가신 예수님의 것도 있고, 한 달 전 먼저 떠난 처제가 남겨 준 것도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그들의 죽음이 남겨준 것들을 먹고 삽니다. 그리워하면서, 한없이 감사하면서. 그리고 기대해봅니다. 그로 인해 내 안에서 시작될 어떤 생명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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