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보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라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세기 29:31-30:24).

이 세상은 치열한 경쟁의 장이다. 야곱의 가정을 통해 경쟁에 대해 생각해 보자. 경쟁에 필연적으로 끼어들 수밖에 없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무정함을 보자.

유목민 사회에서 남자들이 생존을 위해 다른 족속의 유목민들과 싸우는 동안, 여자들은 일부다처제의 집안에서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투쟁하였다. 가정 안에서 확고한 위치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아들을 많이 낳아야 했다. 아들이 많아야 힘이 생기고 부가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면 아내들 간의 애정 싸움이 치열해진다. 게다가 자매를 아내로 맞이하면 자매 사이의 애정 싸움은 더욱 미묘해지고 시기 질투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라헬은 남편의 아이를 낳지 못해 레아를 시기하고,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해 라헬을 질투한다. 이들의 시기 질투는 자식들 사이에서도 대를 이어 계속된다.

레아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늘 괴로워하였다. 그녀에게 달콤한 신혼은 없었다. 야곱이 그녀와 결혼한 지 8일째 되던 날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노골적으로 레아를 멀리했기 때문이다. 레아의 유일한 희망은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아들을 낳으면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레아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세 아들을 낳고도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더는 기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넷째 유다를 낳았을 때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야곱의 사랑을 받았던 라헬은 행복했을까? 레아만큼이나 라헬도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 여자의 자랑거리는 미모와 자녀 숫자에 있었다. 라헬은 하나님으로부터 미모라는 선물은 받았지만, 자녀라는 선물을 받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여인에게 불임은 수치요 슬픔이었다. 불임은 징벌과도 같았다.

언니 레아가 첫아들을 낳았을 때, 라헬의 심장은 질투로 찢어졌을 것이다. 연이어 아들을 낳을 때마다 그녀의 괴로움은 커졌을 것이다. 레아가 네 번째 아들을 낳자 그녀는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30:1). 여기서 죽겠노라는 말의 히브리어 시제는 완료형이다. 죽어 있다는 말이다.

라헬이 소리 지를 때, 그녀는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소리 지르지 않았다. '아들들'을 갖게 해달라고 소리 질렀다. 라헬은 나중에 두 아들을 갖게 되지만 두 번째 아들을 낳다가 죽는다. 전병욱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입술이 우리의 미래를 좌우한다. 우리가 '망한다. 망한다.'고 하면 진짜 망하고 '죽겠다. 죽겠다.' 하면 진짜 죽는다. 말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의 능력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예수님은 말씀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쳤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 생을 망친다. 작은 불씨가 많은 나무를 태운다. 작은 키가 큰 배의 진로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세 치 혀가 인생의 진로를 바꾼다. 그러니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감사드려야 한다."

라헬이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고 부르짖자 야곱도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불임의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는 남편의 말을 들은 라헬은 그녀의 몸종을 통해 두 아들을 얻는다. 우리는 라헬에게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범했던 실수를 똑같이 본다. 라헬이 몸종 빌하를 통해 두 아들을 낳고 으스대자 레아의 경쟁심이 달아올랐다. 레아도 몸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었다. 경쟁의 연속이다.

결과적으로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창 28:14)라는 하나님의 축복이 가시적으로 성취된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그를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얽히고설킨 애정 다툼은 끝이 없었다.

또 한 번의 다툼이 레아의 맏아들 르우벤이 합환채를 얻어 오면서 시작된다. 합환채는 고대에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나무 혹은 불임 치료제로 알려져 있었다. 라헬이 그것을 좀 나누어달라고 하자, 레아는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며 분개한다. 라헬은 합환채를 자신에게 주는 조건으로 그날 밤 야곱과 잘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임신한 사람은 레아였다. 레아는 두 명의 아들, 잇사갈과 스불론 그리고 딸 디나를 더 낳는다.

한편 라헬은 합환채 사건 이후 3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절망이 극에 달한 어느 날 드디어 아들을 낳게 된다. 라헬이 아들을 낳은 것은 합환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22절에서 사용된 일련의 동사들이 하나님의 자애로운 행위를 가리킨다. 라헬은 어렵게 요셉을 얻고도 아들을 더 낳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조른다.

어떻게 해야 라헬과 레아는 만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까? 그들이 비참하게 살았던 것은 비교하면서 상대방을 시기, 질투했기 때문이다.

시기와 질투는 타락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남이 나보다 우월하면 시기하고 질투한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3:16). 요란과 악한 일 속에는 평화가 없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

시기심은 궁극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 3:27).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질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받은 사람은 그만큼 크게 봉사하라는 것이다. 능력과 자질을 하나님으로부터 적게 받았다면 소박하게 봉사하라는 것이다. 주어진 능력만큼 최선을 다하면 된다. 조급할 것 없다. 조바심을 낼 것도 없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기쁨과 감사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이다.

불행으로 향하는 지름길은 비교하는 마음이다. 반면 행복으로 향하는 지름길은 내 것과 네 것 모두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로 인식하고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비교의식은 열등감과 우월감을 낳는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다. 끝없이 상향의 나선 계단을 오른다. 거기에 행복은 존재할 수 없다. 반면 창조의식은 서로의 모습을 즐기며, 경쟁하지 않고 관대함과 여유를 갖고 서로를 끌어안게 한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이라고 말한다.

"요점은 내가 내 이웃만큼 선하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만큼 선하냐이다. 문제는 내 학식과 신앙심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더 나으냐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비교해서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이다. 인간적 비교를 통해서 자신을 판단하는 한, 우리는 자만에 빠질 여지가 많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을 비교하고,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할 때 우리는 낮아지고 믿음이 생겨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존하는 것밖에 믿음을 얻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는 함정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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