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 (19)

감정과 분별 7

우리 마음에 낙담이나 절망이 찾아올 때에는—정신질환이 있거나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 이상—누구나 긴장한다. 그리고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삶의 바닥을 칠 때에는 많은 고통을 수반하나, 도리어 그런 고통의 양만큼 우리의 영혼은 ‘깨어’ 있을 수 있다. 너무 괴로운데 잠을 편히 잘 수 없는 것과 같다. 길을 잃었을 때,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그런 느낌? 

우리들의 문제는 도리어 우리가 너무 평화롭고 기쁠 때 터진다. 흥분이 도를 넘으면 사고를 치게 되는 것과 같다. 험난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평화와 기쁨이라곤 느껴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이런 감정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면 우리의 감정적인 고삐들은 쉽게 풀려버리고, 자만하게 되고, 분별해야 할 것조차 간과할 수 있다. 충동구매가 일어나는 원인과 같다. 고객에게 물건을 사게 하려면 그를 열 받게 하든지 기분 좋게 하든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닌가? 내가 점원이라면 후자를 사용할 것 같다. 특히 내가 사는 북미가 아니라 한국과 같이 '기분파’라는 단어가 여전히 후한 점수를 받는 사회라면, 기쁨과 같은 감정은 늘 충동의 화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다룰 때 가장 어렵고 민감한 사실은, 우리 마음에 이런 감정들이 생겼다고 해서, 흡족함이 물같이 솟아난다고 해서, 무조건 이런 감정들을 순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적인 사탄도 동일하게 이런 마음으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다. 지금 당신에게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 사탄이 다시 나타나 동일한 시험을 한다고 치자. 세상을 다 주겠다고, 부와 명예를 주겠다고, 대신 자기 말만 들으면….. 이런 제안을 받을 때 짜릿하지 않을까? 사탄이 자기를 알아 봐주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할까? 사탄은 우리를 언제나 어떤 방법으로도 황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너무 황홀하다 못해 취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감정이고 어느 것이 사탄에게서 오는 것인가?

평화와 기쁨이나 위로나 흡족함과 같은 감정 그 자체를 심리적으로 일일이 검증할 수는 없다. 이런 감정이 생기는 그 순간에는 판단이 어렵다. 감정을 저울질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하지만 분별력의 스승인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가 우리에게만 귓속말로 알려준 지혜는, 이런 행복한 감정들이 우리 안에서 얼마나 오래 어떻게 지속되는지를 관찰해 보면 그 진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3세기 사막의 성자로 알려진 성 안토니우스는 사막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찾아온 천사들과 화려하게 치장한 악마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들이 떠난 후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천사가 왔다가 떠나가면 그의 존재로 인해 힘이 솟고, 악마가 왔다 가면 공포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뱀은 결국 꼬리를 보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면밀히 관찰하면 그 원천이 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대단히 내향적인 작업을 요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감정이 나의 삶의 조화나 균형을 해치는 것인가?’ ‘가정에 충실해야만 하는 나에게 가정을 '당장'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해라?’ ‘어제까지 하던 일을 ‘당장’ 그만두고 사십일 작정 기도를 시작하라고?’ 나의 삶과 가족과 교회의 다층적인 관계 속에서 균형감이나 건전성을 무시하도록 충동한다면 그것은 검증되어야 한다. 『밀밭의 가라지』의 저자인 토마스 그린 신부는, “현재 나의 삶에 순종할 것과 책임을 멀리하고 기도하도록 이끌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감당해야 할 짐을 대신 지도록 한다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어찌됐든 결정을 내렸다고 하자. 이제는 이런 위로의 감정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 진행 과정을 잘 관찰하는 것이다. 나를 조급하게 만들어 남 앞에서 간증하고 작정하게 하는지, 평상시 하지 않던 행동을 하게 하는지를 관찰한다. 우리에게 온 감정이나 위로의 끝이 선한 방향으로, 혹은 일관된 방향으로 지속되지 못하고, 또 다른 변화와 혼동을 가져온다면 이런 감정은 의심해야 한다.

이그나타우스의 회심 과정은 우리에게 이런 감정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스물여섯 살 때까지만 해도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를 좇는 사람이었다. 명성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크고 헛된 욕망을 가지고 그는 군사훈련을 즐기고 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그는 부상을 입었고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렀다. 회복의 와중에 그는 『그리스도전』과 『성인열전』을 읽게 된다. 성 프란시스코나 성 도미니코가 한 일을 내가 해보면 어떨까? 스스로 성취하고 싶은 세속적인 업적에 관한 공상과 머리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업적에 대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지쳐서 그것을 떨쳐버리고 다른 일에 마음을 돌려버릴 때까지 오랫동안 그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세상사를 공상할 때에는 당장에는 매우 재미가 있었지만, 얼마 지난 뒤에 곧 싫증을 느껴 생각을 떨쳐버리고 나면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는 일, 맨발로 걷고 초근목피로 연명해가는 성인전에서 본 고행을 모조리 겪는다고 상상해 보면 도리어 위안을 느낄 뿐 아니라, 생각이 끝난 다음에도 흡족하고 행복한 여운을 맛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 차이를 따져볼 엄두도 못 냈다. 그러다가 차츰 그의 눈이 열리면서 그는 차이점에 놀랐고, 곰곰이 따져보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앞의 공상은 씁쓸한 기분을 남기고, 뒤의 공상은 행복감을 준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는 서서히 자기를 동요시키고 있는 두 정신의 차이를 깨닫기에 이르렀으니, 하나는 악마에게서 오는 정신이 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자신의 감정에 대한 분별의 결과로 그는 성인들의 본을 받겠다,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서원하게 되며 정욕을 좇지 않고 영의 인도함을 받게 된다. 다음해 1522년 3월, 총상이 완쾌됨과 동시에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바울이 올바로 지적했듯이, 사탄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줄 안다(고후 11:14). 이 말은 곧 사탄이 우리들의 감정을 이용한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마음의 평화나 기쁨을 조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들은 이런 감정들이 생길 때,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그 이유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 사탄의 시녀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런 면에서 성령을 받았을 때, 우리의 입으로 쉽게 고백하거나 각오하고 시인하는 것들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감상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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