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것)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했다. 여기에서 ‘두려워’하라는 단어는 ‘경외’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는 헬라어 ‘포보스’가 그  원어이다. 이 단어는 영어로 ‘두려움, 공포, 존경, 경의’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위의 성경 구절에서 몸과 영을 멸하시는 자(하나님)를 ‘두려워’하라는 단어는 ‘경외’하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의 참 성도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빌 2:12).

첫째, 하나님을 경외함은 하나님의 요구이다. 

모세는 그의 율법에서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신 10:12)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혼까지 죽이지 못하는 세상의 그 어떤 공포나 위협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요즈음 세상의 온갖 재해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한동안 수그러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또다시 기세가 상승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부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재난들은 세상 종말의 징조라도 되는 것처럼, 지구촌 곳곳에서 홍수와 지진, 화재 등의  난리를 겪고 있다.

이러한 때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를 갖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눈앞에서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산사태 등으로 매몰되는 현장을 보며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 아니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그 어떤 공포의 대상보다 우선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함은 성도들의 본분이다. 

전도자는 그의 저서에서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성도)의 본분이니라”(전 12:13)라고 했다.‘본분’이라는 히브리어의 원래 의미는‘전부’이며, 루터는 ‘모든 사람이 지고 있는 의무’라고 했고, 인간의 운명은 바로 이것에 달려 있다고 했다. 

주석가는 ‘인생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지음 받았으며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만 달려 있다고 했다. 또한 사람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 모든 행동 원리가 결정되며, 그에 따른 행복 여부도 결정된다고 했다. 또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할 때에 비진리의 생활이 연출되고, 비진리는 영원한 불행을 가져오기에,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경외)함으로써 행복하다고 했다(박윤선 주석 참고).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 마땅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전 7:18)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은혜이다. 

아무리 세상이 요란하고 위협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하더라도 참 성도들이 두려워할 것이 없음은, 성도들의 배후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증언하고 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시 103:17)라고. 

‘영원부터 영원까지’라는 말씀은 결코 흘려 들을 말씀이 아니다. ‘영원’을 보장받는다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확실한 말을 세상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닌가!

예수께서 세상의 종말을 묻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자. 미혹, 난리, 전쟁, 지진, 기근, 온역, 무서운 일, 하늘에서 오는 큰 징조, 성도들에 대한 핍박 등 온갖 위협과 공포(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겪고 있는 사건들)가 있을 것을 예언(눅 21장)하셨지만, 성도들에게는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눅 21:18)고 하신 이 약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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