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나의 목회 (1)

윤호용 목사

제가 경험한 아픔, 고통과 고난을 나누는 일이 그 누군가의 말 못할 아픔과 마음을 조금이라도 어루만질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삶’이라는 한 글자 속에 수많은 사연들이 공존합니다.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나가는 기쁨과 실패가 주는 아픔이 있고, 인간관계 속에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남모르게 눈물 흘리는 일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제 간증을 나누어 누군가에게 제 삶과 마음이 전달되어 닫힌 마음이 열리고, 삶이 회복되고, 살아갈 용기를 갖게 된다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 삶을 나누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의무경찰로 군 생활을 마치고, 1989년 2월 말, 부모님 초청으로 미국 알래스카로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이민자들이 “처음 이민 올 때 공항에 누가 마중을 나오느냐에 따라 무슨 일(Job)을 할지가 결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 역시 낯설고 물선 알래스카에서 먼저 이민 온 사람들의 말 한 마디가 법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시 작은 매형의 친구가 청소회사를 하고 있어서, 부모님과 매형의 권면대로 영어도 못하는데 아무도 없는 빌딩에서 저녁 청소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오기도 전에 매형이 친구에게 부탁해 놓은 청소일을 알래스카에 온 다음날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앙이 있건 없건 “무조건 주일에 교회에 가야 이민 생활이 외롭지 않고, 정보도 얻고 도움도 받을 수 있고, 조국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다.”고 해서, 3월 첫 주부터 많은 성도님들의 환영을 받으며, 먼저 이민 온 가족이 다니는 순복음교회에 자연스럽게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희노애락을 같이하는 이웃사촌들이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 청소를 하다보니, 이민 선배들은 1시간 만에 끝내는 일이 4시간을 해도 끝나지 않아, 앞날이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신앙보다 일이 먼저였기에, 주일에 교회 가는 것 외에는 교회에서 도움 받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믿음으로 섬기거나 나누는 일은 엄두도 못 내던 때라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영어를 못해 청소일을 하는 도중에 배가 고프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냥 물을 마시며 참든가, 아니면 가격이 저렴한 맥도날드에 가서 세트 메뉴 중 넘버 원 앤 콕(Number one and Coke)을 주문해야 했습니다. 직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빅맥과 감자튀김과 콜라의 맛은 최고였습니다.

한국 운전면허증이 있어도 미국 운전면허증을 다시 따야 했습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이론 시험은 무사히 통과되었지만, 실기(주행) 시험은 말이 통하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야 할 때 돌리지 않아서, 돌발 상황에서 신호를 켜고 한쪽으로 비켜 차를 세워야 하는데 그냥 그 자리에 차를 세워서, 세 번이나 낙방하는 바람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 부모 세대들은 누가 이민을 왔다 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궁금해 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고향의 정이 그리워서인지,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 것까지 다 헤아릴 정도로 모두가 가깝게 지내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안에는 ‘깡’이 있었습니다. 바로 “너희들이 한국말 못하는 거나 내가 영어 못하는 거나 똑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깡으로 버티고, 눈치와 보디 랭귀지를 동원해 청소일을 하면서, 쳇바퀴 돌듯 일터와 집과 교회를 오갔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타이레놀이나 애드빌 두 알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며 병원 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치과 치료를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민 생활에는 건강한 몸이 큰 재산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로부터 “어디에 갔다 놔도 잘 살 거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최소한 일어설 수 있는 지팡이와도 같은 자본금이 준비되지 않은데다, 아직 큰 형 가정이 이민을 오지 않은 때여서 많은 일들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침과 점심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미국 식당에서 배달과 접시 닦는 일을 하면서 배고파 보았고, 집에 와서 잠시 쉬었다가 저녁에는 빌딩 청소를 했습니다. 주말에는 페인팅, 잔디 깎기, 카펫 청소 등 기름을 만지는 자동차 정비를 빼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으며, 큰형수에게 부탁해 한국에서 계를 들어, 2년 만에 사업의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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