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섶에 맺힌 맑은 이슬이 아직 영롱한 이른 아침, 무심코 현관문을 여는 순간 상큼한 바람이 볼을 스친다.  지난밤 잠결에 조금은 구슬픈 귀뚜라미의 노래 소리도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아마 가을이 왔나보다.  어느새 앞뜰의 단풍나무 한귀퉁이가 밝은 주홍빛을 띠고 있다.  길 건너편의 앞집과 그 옆집의 나무들도 아직은 푸르러 보이지만 머지않아 온 산과 들의 모든 나무들이 노란 옷, 붉은 옷 혹은 갈색 옷으로 갈아입는 계절이 온 것 같다. 

뜨겁던 태양의 열기가 그 기세를 숙이고 소슬바람이 옷깃에 스며들 때면 나무들은 누가 도와 주지 않아도 서둘러 울긋불긋 화사한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다.  꽃이 만발한 새봄의 나무 못지않게 곱게 물든 단풍나무를 보면서 긴 여름을 무사히 살아낸 것에 감사하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설레임에 젖기도 한다. 

가을이 가을다워 보이도록 단장한 단풍나무들은 모두 곱다.  그런데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하나같이 곱고 예뻐보이는 그 단풍잎을 손에 주워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각기 다른 모습에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나뭇잎 하나하나를 위해 여름이 지어준 가을 옷을 입은 단풍잎에 그들만이 알고 있는 어떤 사연이 물들어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무덥고 긴 여름을 살아내며 겪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려올 것만 같다.  찬란했던 추억과 함께 아프고 두렵던 순간의 일들까지도 숨김없이 들려 줄 것 같다. 

후두둑후두둑 쏟아지던 장대 같은 굵은 소낙비에 여린 나뭇잎들은 멍이 들고, 이글거리던 태양볕에 그을리며, 사나운 비바람에 찢긴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안쓰러운 단풍잎들의 이야기가 나직히 귓가에 들려온다.

간혹 여름이 안겨준 축복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 흠 없고 고운 단풍잎도 더러 있다.  하지만 가을이 오기까지 비바람에 찢기고, 뙤약볕 아래 그을리며 인내를 기르고 견딘 얼룩진 단풍잎들이 흠 없고 화사한 단풍잎보다 더 소중하고 귀하게 보인다.  비록 온전치 않은 모습에 얼룩진 옷을 입었을지라도 길고 무덥던  여름을 열심히 살아낸 그들에게 여름이 입혀준 상급의 아름다움을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움에 비할까! 

수많은 사연 속에 푸르름을 묻어버린 단풍잎들!  뜨겁게 내려쬐이던 태양이 높은 가을 하늘 위로 훌쩍 올라가버린 후, 여름 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던 하얀 뭉게구름도 어디론가 숨어버린 날, 쓸쓸함을 가눌 수 없는 나뭇잎들은 하나둘 낙엽이 되어 서둘러 떠나는 여름을 따라간다.  함께 여름을 살아온 나무를 떠나야 하는 섭섭함을 안으로 접어둔 채 봄이 오면 꼭 다시 오리라는 기약만 남기고 훌훌 떠나간다. 어디론가 정처없이 바람에 불려 굴러가는 낙엽을 보며 필경 어딘가에 그들을 기다리는 영원한 쉼터가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소원해 본다. 

 

가을 바람에 정처없이 불려가는 낙엽 위에 지금의 내 모습을 오버랩시켜 본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지나온 세월이 지어준,  수많은 사연이 담긴 마지막 옷을 입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우리의 지나온 삶이 낙엽의 그것처럼 크고 작은 사연들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가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있다.  정처없이 바람에 불려가는 낙엽과는 분명 다르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마련하신 영원한  쉼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죄인되었던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단 하나 목숨까지 내어 주신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본향 천국에 처소를 마련하고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신다고 약속하셨다(요 14:2).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주님의 그 약속이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준다.

나뭇잎 하나하나를 곱게 입히시는 자상하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는가!  신실하신 그 주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가을 옷을 준비하는 때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연악하고 부족하지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의 형편을  살피시며, 때를 따라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매일매일의 삶을 감당하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다.  또한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참 지혜를 주시고 일일히 간섭하시며 도우신다.  지금 우리가 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겸손과 온유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온전한 진리 위에 굳건하게 서서 옳고 그름을 밝히 분별하고, 인내하며, 서로 사랑하고 세워 주며, 인생의 가을 옷을 준비하는 일보다 더 중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오직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노라면,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름다운 가을 옷을 손수 준비해 주시리라 믿는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찾아 주시고 아픔과 슬픔의 눈물을 닦아 주시던 가이없는 주님의 사랑과 용서로 곱게 물든 감사의 옷,  자비와 긍휼로 곱게 수놓은 은혜의 옷,  흠도 티도없는 눈부신 흰옷이 상급으로 우리에게 입혀질 것을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에 오직 평화와 영원한 쉼이 기다리는 천국의 본향집을 향해 기쁘게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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