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는 일이 곧 그리스도의 일이고, 내가 있는 곳이 그리스도의 통치가 있는 곳이며"

 

로고스 채플 강단 (5)

바울이 골로새 교인 빌레몬에게 쓴 편지인 빌레몬서를 보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물건을 도둑질하여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 후 하나님의 섭리로 로마에서 감금 상태인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믿음의 형제로 받아 달라는 편지를 써주는데, 그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이다. 

빌레몬서 1장 10절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라고 시작한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장과 같다고 하면서, 형제로 대할 것과 반갑게 맞아 줄 것을 부탁한다. 동시에 오네시모가 입힌 손해는 바울 자신이 갚겠다고 말한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몬 1:16-18).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와 골로새서를 쓸 당시의 노예제도는 사회 전반에 통용되던 제도였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인구 중 삼 분의 일이 노예였을 만큼 그 수가 엄청나서, 교회의 교인 중에도 노예들이 많이 있었다. 노예들은 로마의 부자들이 소유한 가축보다 낮은 가격으로 매매될 만큼 가치가 없었고, 팔려간 주인집에서 평생 자유 없이 시킨 일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노예로서 종된 삶은 소망도 가치도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해 복음에는 차별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모두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골로새서 3장 10-11절에서 사도 바울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라고 말한 것처럼, 차별 없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사람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복음의 효력에는 이방인, 유대인 등 민족의 차별이 없으며, 할례의 유무에 의한 차별도 없고, 오랑캐나 문맹인이나, 종의 신분이나 자유인은 물론이고 그 어떤 것도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차별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나아가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까지 새롭게 된다. 이 지식은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생긴 영적 지식을 말한다. 이는 노예의 신분이라도 새사람이 되어 신앙적으로 영적 지식이 뛰어나면 영적 리더로서의 역할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있어 유일한 전부가 되시기에, 피조물 중에 그리스도의 주관과 통치를 벗어나 다른 구원의 기준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당시 노예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복음 중의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새사람이 되어 말씀처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을까? 골로새서 3장 1-4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이므로, 그리스도로 인해 새사람으로 입혀져 이전 것은 상관 없게 되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고 말한다.  “마음을 다하여”란 말은 “영혼에서부터”를 의미하는데, 노예로서 하찮은 일을 할지라도 영혼에서부터 그 일을 하라는 것이다. 영혼에서부터 일을 한다는 것은, 종으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새사람으로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으로 새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일로 영화롭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고 말한다. 골로새서 3장 24절 말씀이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 3:24). 종으로서 하는 일은 기업의 상,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을 유업의 상이 없다. 새사람으로서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기에 우리가 하는 일을 그리스도의 일로 기억해야 한다. 

노예의 신분으로 종의 일을 벗어날 수 없고, 주인을 바꿀 수 없고, 도망할 수 없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의 신분과 제도를 바꾸는 것을 뛰어넘어 노예의 일이나 왕의 일이나 귀천에 상관없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아 주셨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제사에서 당시 이교도들이 자기가 섬기던 신에게 가장 높은 헌신의 표현인 자녀 제사를 드리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은 당시 이교도들의 자녀 제사를 아브라함의 제사를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에 의한 순종과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통해 거룩한 제사로 영화롭게 하셨다. 죄수의 사형을 집행한 십자가의 형틀에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심으로, 십자가가 희생과 대속의 상징으로 변화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세상에는 지금 내가 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고, 더 많은 이익이 생기고, 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그러한 곳을 동경하며 찾는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곧 그리스도의 일이고, 내가 있는 곳이 그리스도의 통치가 있는 곳이며,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우리는 육신의 상전에게서 받는 상이 전부가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업의 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의 능력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우리는 가정과 직장 그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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