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는 광야 신학과 철학이 필요하고, 가나안에서는 가나안 신학과 철학이 필요하다.

광야 신학은 모세가 모세 오경을 통해서 준비하였다. 물론 모세 오경은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이 행해야 할 영적 방향도 들어 있었지만..

결로부터 말하자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룬 후 가나안에서의 분명한 가나안 신학이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은 사사기 시대의 영적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는 개개인의 신앙 생활이나 모임이나 교회, 교단의 신앙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광야에서나, 가나안에서나 중요한 것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구원자이시고 창조주이시고, 유일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마음 첫 자리에 두고 섬기는 것이지만, 인간은 심히 연약한 존재이다.

광야에서 열심히 충성과 헌신을 다해 사랑하던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금방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고 변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변화된 상황과 환경에서는 (하나님과 복음의 본질은 늘 변함이 없지만),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과 복음의 본질의 절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연약한 본성때문에, 거기에 걸맞는, 변화된 상황과 환경에 걸맞는 영적 철학과 신학을 제시해 주는 심각하고 아름다운 고민을 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해서 나온 아름다운 신학과 철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물론 사람을 자연스럽게 절대자 하나님과 절대 복음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죄의 성향 때문에. 인간의 죄의 성향이라 함은 변화된 환경과 상황에서 사람은 먼저 하나님 중심의 삶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환경과 상황 속에서 먼저 자신의 생존과 안전과 번영을 추구한다. 겉으로는 변화된 환경과 상황의 전과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그렇게 생활하였다.

광야의 환경, 가나안의 환경의 각각의 특성은 무엇인가? 광야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100%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공급하심으로 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아무 것도 심을 수 없고,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곳이다. 강렬한 낮의 살인적인 열기는 하나님의 구름기둥으로 보호받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밤에는 하나님께서 불 기등으로 지켜주지 않으시면 그들은 생존이 불가능하다.

애굽에도 고난이 있고, 광야에도 고난이 있고, 가나안에도 고난이 있다. 물론 그 고난의 유형과 종류가 다를 뿐이다.

애굽의 고난은 바로의 노예로 고통하는 것이고, 광야에서는 무엇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오는 고난이고, 가나안에서의 고난은 가나안 적을 몰아내는 사명을 감당하는 고난과 믿음으로 주변 적들과 싸워 이기는 고난이다. 더 나아가서는 가나안 땅에서 출애굽 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세계를 향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고난이다.

애굽의 고난을 통해서는 사단의 노예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알게 되고, 광야의 고난을 통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의 양식의 유일한 공급자이심을 알게 되고, 가나안에서는 강대 적국들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이 전 세계를 다스리는 주권자이심을 알게 된다.

가나안이 의미하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그들의 목표요 소망이요 희망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목적이었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 애굽을 하면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가나안 땅은 매우 근접한 땅이라 직선 거리로 가면 며칠이면 도착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고 굴곡진 광야, 심히 거칠고 황량한 그 광야를 인내로 견디는 데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강력한 고난 속에서 고통하는 사람에게는 먼저는 그 고난 자체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의 강력한 소망이 된다. 더 나아가서는 그 고난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상급에 대해 자연스러운 바램을 가지게 된다. 이는 누구에게나..

그러나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빗나감과 영적 탈선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그들에게 원하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통해서 원하는 것 사이의 철저한 균열과 분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는 경우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는 가의 문제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거의 대부분의 문제들, 개인의 영적 생활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문제들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나의 목적이 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교회의 목적이 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교회를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의 목적이 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교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모든 하나님의 양 무리들의 목적이 된다면, 개인과 하나님과의 갈등, 영적 지도자와 교회의 갈등, 교회와 교회의 하나님의 양 무리들 과의 갈등, 영적 지도자와 하나님의 양 무리들 과의 갈등은 100%가 다 해소가 안되더라도 하더라도 지극히 많은 부분에서 해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이 하나님을 따르는 목적이었을 때는 늘 하나님과 갈등을 일으켰는데, 이삭을 드리고 이제 하나님을 따르는 목적이 하나님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는 더 이상의 갈등과 긴장 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영적 비밀을 아브라함과 교통하시고 제시하시는, 실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요 영적 동역자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의 영적 지도자의 위치와 역할이 중요한 것은 비록 그가 하나님의 도구일지라도 그가 어떤 영적 도구가 되는 가, 즉 그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양 무리들을 하나님의 목적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따르도록 돕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통해서 단순히 그들 자신의 목적과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즉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도록 돕고, - 물론 이는 초기의 어린 신앙이 당연히 거치는 과정이지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즉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던 유아적 신앙에서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가 하는 것은 교회와 개인의 근간과 근본을 좌우하는 매우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물론 영적 지도자가 본인 자신이 그 영적 지도자 위치에 있는 것 자체가 그 자신의 인생 문제의 해결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면 그 역시 당연히 하나님의 양 무리들이 하나님이 목적이 아닌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 문제의 해결 차원에 머무르도록 도울 수밖에 없다. 영적 지도자가 본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신의 인생 문제 해결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목적이 아닌 수단인데, 그가 인도하는 하나님의 양 무리들에게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라고 강조하고 섬길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으로 삼도록 아무리 강조해도,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수단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나오는 데, 하나님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섬기도록 돕는 데서, 하나님을 목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우물에서 숭늉을 찾으려는 심히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가나안을 통해서도 과연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이를 통해서 왜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매우 심각하고 불행한 사사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는가?

물론 이런 부분에서도 모든 성경을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 차원에서만 공부하고, 전혀 영적 교훈 차원에서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 의식조차 가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문제 의식을 가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일종의 불경죄라고 여길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구속 섭리 차원에서 훤하게 알고 이를 통해서 로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라는 놀라운 주제로 성경을 해석한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10장을 보면 역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죄와 잘못과 영적 탈선을 교훈 삼아 이를 반복하지 않도록 교훈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적 측면과 오늘날 교회와 개인에게 현재 주시는 영적 교훈의 두 가지 측면에서 함께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사사시대를 맞이했던, 그것도 왜 그렇게 심각하게 숱하게 반복적으로 행하게 되었는 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거기서 현재에 주시는 하나님의 날카로운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나안에서의 사사시대는 고난을 잊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 고난은 애굽의 고난, 광야의 고난을 의미한다. 고난을 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가나안에서, 즉 하나님의 축복이 독이 되는 것은 과거의 고난을 잊고, 그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축복 자체에 빠질 때이다.

가나안에서의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떠나 오직 생존 문제에 집착한데서 기인한다. 광야에서 먹이시고 기르시고 입히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 가나안에 그들을 인도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 이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때, 그리고 오직 그들 자신의 능력과 노력과 가나안 족속들의 농업 노하우를 배워서 생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을 때 어쩔 수 없이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농경신, 바알을 숭배하는 죄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나 불신자에게나 생존은 똑같이 본성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능력과 주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백성은 불신자들과 함께 세상 속에서 생존을 위해 그들과 함께 생존 경쟁을 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잃고, 애굽과 광야의 고난 속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가나안 땅에서 농업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오직 생존에 몰입했을 때, 그들은 가나안에서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그 이방 백성들을 본받아, 그들의 생존 노하우를 따와서, 그들 스스로가 생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 때 사사시대의 영적 대혼란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주변 강대국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체, 그들 스스로가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해서도 안되는 그 생존 문제를..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생존 경쟁을 위해서 살고자 할 때, 이미 그런 생존 경쟁을 한다는 의미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아닌, 자신의 능력과 노력, 그리고 세상 속에 있는 그들 불신자들이 복음의 대상임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생존을 위한 경쟁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고, 섬김의 대상이며, 복음의 대상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물론 가나안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비롯한 죄를 미워하고 싸워야 하지만, -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백성들과 싸워서 그 땅을 정복하게 하실 때, 그들을 철저히 진멸토록 하신 것은 단순히 가나안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런 가나안 백성들처럼, 그들과 같은 죄에 빠지면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신것 이라고도 생각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목표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자체, 땅을 얻는 것 자체, 그 땅을 얻어서 누리는 눈에 보이는 축복들을 얻는 것 자체, 그 목표를 얻는 것에 목적을 두면, 그 목표를 얻은 이후에는 반드시 영적 사사시대가 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고,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그리고 그 목표가 마치 목적이 되었을 때, 그 이후 그들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나침반을 잃어버렸다.

믿음생활을 하면서 개인이나 교회나, 하루나 한 달, 혹은 일년이나 십년이나 혹은 평생 동안, 도달하고 이루어야 할 목표를 정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그러한 목표는 잠정적으로 동기를 부여하고, 나태해지기 쉬운 마음에 자극을 줄 것이다.

그런데 목표는 목적 속에 포함이 되어야 한다. 그 목표는 목적을 위한, 목적을 향한 목표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목표는 목적을 향한 수단이나 도구여야 한다. 그런데 많은 부분, 그런 목표가 마치 목적처럼 탈바꿈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면 어떤 문제들이 생겨 날 것인가?

목표가 달성되든가, 그러한 목표가 달성이 되지 않던가, 똑같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가나안이라는 축복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의 목표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어느정도 마무리하면서 바로 그런 점들을 고민하고 풀어 나가야 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영적 리더로서는 존대받을 수 있겠지만, 그 이후 그는, 모세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 오경을 통해서 광야 백성들에게 창세기를 통해서 그들의 영적 정체성과 믿음의 뿌리,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은혜를 심었고, 또 가나안 땅에서 들어가서 주의하고 지속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가르쳤듯이 어쩌면 그런 영적 교훈이 부족했고, 이를 위한 지속적인 영적 지도자들과 영적 리더 양성에도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가나안은 영적 측면에서 하늘의 가나안을 의미하며, 이는 히브리서 저자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히 4:1,2,8,9,10)

요약해 본다면, 가나안으로 표현되는 눈 앞의 축복이나 가시적인 목표는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하여, 그 안에 포함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애굽의 고난 (사단의 노예), 그리고 광야의 고난을 잊지 말아야 하며, 즉 그 고난에서 함께 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고, 가나안이라는 눈 앞의 축복은 하늘의 가나안을 향한 소망 속에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명을 위한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할 때 생존이라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과의 생존 경쟁이 아닌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대상들이 될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혼란의 사사시대를 묵상하며 오늘날의 그러한 영적 사사시대는 어떻게 왜 오게 되는 가를 살펴 보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축복이 지속적인 영적 싸움의 중단, 죄와의 싸움의 중단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교훈을 깊이 배우며..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 11:20-26).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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