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수요일마다 드리던 요양원에서의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기다리시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그분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 시간은 예배의 시간이라기보다는 만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분들과 평안의 인사를 나누는 순간 그분들은 살아계십니다. 그분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순간이 그분들이 제게 반응하는 시간이고 그 반응이 곧 그분들이 인간으로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반응할 수 있는 이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서 설교를 할 때 그분들의 반응을 유도합니다. 대개는 엉뚱한 대답이 나와 웃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저와 함께 드리는 예배가 환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그분들에게 그런 인간적인 반응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 가운데 그분들을 돌보시는 케어선생님들과의 접촉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케어의 손길이 직업이 아니고 사랑이 실린 손길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늘 돌보시는 선생님들에게 사랑이 넘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지만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거나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적은 인원으로 적은 보수를 받고 일을 하면서 거기에 마음을 담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하지만 신앙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쨌든 아무와도 만날 수 없는 코로나 정국에 예배마저 드릴 수 없게 된 일은 매우 안 된 일입니다. 누구와도 접촉이 금지된다는 것이 사실은 인권침해인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사실 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편리를 위해 관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비인간적인 처사라는 것은 부모를 그곳에 모시고 면회를 와서 마음 아파하는 자식들을 보아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인간을 방기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한 노인이 전신이 마비된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모습을 티브이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늙어 돌봄을 받던 노인처럼 되면 저를 시설에 보내라고 할 것이지만 아내가 먼저 그렇게 되면 저는 아내를 그런 시설로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동귀어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귀어진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풍성해지는 일입니다. 티브이에 나온 그분처럼 그렇게 자상하고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돌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아내를 시설이라는 허가 받은 무덤에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를 시설에 보내라고 하는 것도 재고해 보아야 할 사항임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제 아내와 아이들이 저를 위해 바칠 수 있는 섬김과 희생의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돌봄을 받는 것은 돌보는 일과 똑같이 중요한 일입니다. 돌봄을 받는 사람이 있어 돌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돌보는 삶을 살라는 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권면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가인은 자신이 아우를 돌보는 사람이냐고 반문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가인이 자신이 자신의 아우를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돌보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우를 돌보지 않았음은 물론 아우를 살해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결국 아우를 돌보는 일에 실패하면 아우를 죽이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일까요.

신앙은 바로 여기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고 생명으로 풍성해지는 일은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주님만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 생명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이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극한 가난에 직면하자 피를 나눈 형제들이 저를 외면했습니다. 그 형제들은 자신들이 저를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냥 연락을 안 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의 아우 이해입니다. 가인의 그 마음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우를 돌보는 우리의 사명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결국 아우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길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을 찾으려고 후미진 곳을 샅샅이 살피며 다닙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통 보이질 않습니다. 도대체 그런 분들이 어디에 숨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제 핸드폰에 꽂아둔 만 원짜리들이 사용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세상 문화는 요양원을 좋은 제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요양원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이루어보려고 기다리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런 돌봄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 생명을 주고 생명으로 풍성해지는 곳,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교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지 않는다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교회는 적어도 그런 시설들의 부당함을 말없이 고발하는 빛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자매와 형제가 되어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사는 곳입니다. 물론 하나님 의 가족이 되어야 명실상부한 자매와 형제입니다. 그러나 자매와 형제가 되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가족들은 자매와 형제가 아닌 이웃들 역시 자매와 형제로 대하며 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자매와 형제가 된다는 것은 곧 모든 사람들을 자매와 형제로 대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으면 예배시간에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르신들이 생각납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던 어르신들도 생각납니다. 엉뚱한 대답으로 우리를 웃기는 분들도 생각납니다. 초점이 없이 멍하게 계신 분도 생각납니다. 다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제게 자매와 형제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주시던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설교를 하던 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던 그분들이 저와 똑같이 중요한 분들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세상과 삶의 이해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인본주의도 똑같은 일을 합니다. 모두가 함께 일하고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누는 마을에서 노인들이 시설에 가지 않고 임종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라던 이장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 이장님은 신앙 없이도 아우를 돌보는 분이었습니다. 그분 앞에서 저는 얼마나 작아지는지요. 정말 부끄럽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만일, 정말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바로 아우를 돌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눈을 뜬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시설이 없는 세상, 한 사람의 희생이 되는 돌봄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해 인간을 인간답게 살고 죽을 수 있게 하는 세상 그런 세상이 정말 불가능할까요.

새삼 제가 아우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이 부끄러움이 앞으로의 저의 삶에 또 다른 지향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우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가장 먼저 제 아내를 돌볼 것입니다. 동귀어진은 오히려 귀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까지도 그러셨듯이 그런 마음을 가진 저를 돌보실 것입니다.

코로나 정국이 해소되어 다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정말 그분들을 제 자매와 형제처럼 바라보며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분들은 제가 돌봐야 할 자매와 형제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제가 아니라 그분들입니다.

우리는 시설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출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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