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행위로 종교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거나 열등감에 빠져 있지 말고"

 

로고스 채플 강단(6)

세례(침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금식에 대한 논쟁이 마태복음 9장,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에 나온다. 이 부분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된다는 유명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이는 새해가 되면 많이 듣는 설교 제목이고, 신앙 없는 사람들도 많이 인용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의도와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마 9:14)라면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요한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처럼 금식하지 않고 오히려 세리들과 식사한 것을 두고 예수님께 따진다. 당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며 경건 생활을 했다. 바리새인들은 대속죄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도 금식을 했고, 십일조도 빠짐없이 했다(눅 18:12).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과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경건치 않은 자들이고, 더구나 이들을 금식하게 하지는 않고 세리들과 식사를 하게 한 예수님이 못 마땅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못 마땅해 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세가지 비유를 들어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알려 주셨다. 

첫 번째가 혼인집 손님의 비유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여기서 ‘혼인집 손님’은 신랑의 결혼예식을 돕기 위해 온 신랑 친구들을 말한다. 이들은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신부집에 갈 때 들러리가 되었다. 신랑 친구들이 신랑의 혼인 잔치에서 금식하거나 슬퍼하기보다 같이 즐거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당시 금식일에 혼인 잔치가 있으면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이 비유에서 혼인집 신랑은 예수님이고, 손님들은 예수님 제자들을 가리키며 지금은 함께 있어 금식하지 않지만, 신랑 되신 예수님이 붙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그때에는 금식하며 슬퍼하게 된다는 것이다. 

복음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도록 하지 않는다. 만약 금식 행위로 금식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경건하다는 영적 우월감을 갖는다면 복음에서 떠난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라는 갈라디아서 2:16 말씀처럼, 영적 우월감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한 결과이며,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면 결국 율법에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게 된다. 

율법은 완전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율법은 거룩하기에 죄인들은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고 죄성이 드러나게 되며, 또한 심화된다. 율법은 공의롭기에 죄인들에게 구원의 자비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율법은 갈라디아서 3:24 말씀처럼 죄인됨을 깨달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도록 하는 선생인 것이다. 그런데 이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깨달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가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의지해 의롭게 되고자 하는 율법주의에 빠지면, 종교적 우월감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된다. 

옛 언약인 율법은 죄인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지 못한다. 새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죄인된 자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도록 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는 로마서 8:2 말씀처럼, 새 언약은 율법의 성취이고 완성이다.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 3:6). ‘율법 조문’은 어떠한 생명도 줄 수 없으며, ‘영’인 복음과 성령의 법이 생명을 전달해 줄 수 있다.

두 번째는 생베 조각 비유이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마 9:16). 해어진 낡은 옷에 세탁한 적 없는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다면, 이를 빨래할 때 생베인 새 천 조각의 오그라듬이 심해 낡은 옷을 잡아당기게 될 것이다. 여기서 생베 조각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뜻하고, 낡은 옷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전통을 가리킨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행위에 의지하는 율법주의에 양다리를 걸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세 번째는 새 포도주 비유이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 9:17). 가죽 부대는 유목민들이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통째로 벗겨낸 후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오래 되면 뻣뻣해져서 바느질한 부분이 헐거워지는데, 이곳에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를 담으면 나중에 포도주가 부풀어올라 터지고 만다. 

새 포도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담으려면 낡은 부대가 아닌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 새 부대가 되지 못하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역사를 담을 수 없다.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율법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누가복음 5:39의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라는 말씀처럼, 율법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으면 이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율법주의 전통에 빠진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새 부대가 되는 것은 육신의 행위에 따른 율법의 종 노릇 하는 삶이 아닌 성령의 법 아래에 사는 삶이다. 율법의 행위로 종교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거나 열등감에 빠져 있지 말고, 새 부대의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담는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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