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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분별 4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적 분별의 예 : 예루살렘 공의회 ①
박준형 칼럼니스트  |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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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2.30  01: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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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공의회 역사
2011년 영화「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교황직을 거부한 추기경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새 교황을 선출하는 의식인 ‘콘클라베’로부터 시작한다. 108명의 추기경들이 바티칸에 모여 ‘걸쇠로 문을 잠근 방,’ 즉 콘클라베(Conclave)에서 비공개투표로 교황을 선출하는 의식이며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2~5일간 모든 참가자는 이곳에 머무른다. 이 많은 인원이 이 정도의 기간에 ‘교황 선출’이라는 문제를 두고 합숙하고 기도하며 분별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추기경 멜빌이 ‘교황 선출 선언(Habemus Papam)’을 거부하고, 바티칸에서 도망친다. 가장 비밀스럽고 엄숙한 가톨릭의 공동 분별 과정에 외부인 정신분석학자가 초대되고, 정작 교황은 교황청을 떠나 한 개인으로 돌아간다는 가상의 영화이다.

이 영화를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된, 교황 선출부터 교회의 각종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가톨릭의 공동체적인 분별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사도행전 15장에 소개되는 예루살렘 공의회는 집단이나 공동체의 분별이 무엇이고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그 기초를 제공한다. 이 공의회에서 가장 성경적이고 실질적인 공동체의 분별의 모델을 보게 된다. 이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후 4세기 초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 즉 크리스텐덤으로 전환되자 본격적으로 종교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가장 권위 있는 모임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 첫 번째 공의회가 325년 니케아(현재 터키의 이즈니크)에서 열린 공의회이며, 동방과 서방에서 무려 300여 명의 감독들이 참가해 42일 간의 회의를 거쳐 당시 초기 기독교 안에서 시끄러웠던 예수님의 신성 부분에 대한 신학적인 인정과 함께 현재 으뜸되는 기독교 교리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Trinity)’를 인정하게 된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공동체여야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신학적 근거 및 권위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교파들은 이단으로 규정된다.

이후 로마 가톨릭은 공의회 전통을 유지, 계승해 왔으며, 1962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했고(~1965), 이를 통해 소위 ‘현대적 의미의 종교 혁명’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벽이 허물어지고(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는 품위에서는 교황이나 평신도나 차이가 없다. 하지만 과거 2천 년 동안 쌓아온 가톨릭적인 위계가 공동체적 수평의 가치에 그 자리를 물려 주었다는 것은 아니다!), 현지 문화에 대한 수용과 재해석이 이뤄졌으며, 교회의 전통과 의식에 가려져 있었던 성령론이 역동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구체적인 논의와 지침들이 만들어졌다. 5년여에 걸친 공의회의 공동체적 분별의 과정과 합의, 그 이후 전세계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 발효되는 후속 조치와 행동들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일관되게 추진되고 있다.

반면 담임목사가 바뀌면 교회가 송두리째 바뀌고, 교회의 모든 의사 결정은 소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신도는 늘 골프 시합의 갤러리마냥 휩쓸려 다니며 관람만 하고, 교단이 개교회에 대한 자정 기능을 상실하고, 신학교는 소위 ‘전통’ 교리와 순수성 논쟁에 빠져 현실과 동떨어진 ‘신학’을 가르치는 우리의 개신 교회는 언제 지속가능하고 전복적이고 공동체적인 분별이 가능할지 회의가 앞선다.

한국 교회가 지금껏 착각한 것은 교회 잘 짓고, 교회 일 열심히 하고, 교인들 돌보기만 하면 가장 좋은 공동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다. 가장 좋은 공동체는 무엇이든 ‘안에서’ 열심히 하는 ‘갇힌’ 교회가 아니라 무엇을 열심히 할 건지 함께 모여 먼저 분별하는 교회이다. 교회의 구성원이 다같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배우고, 때로는 실수도 하고, 잘하기도 하면서, 같이 슬퍼하고 웃기도 하면서, 공동체적으로 하루하루 성숙해지는 ‘열린’ 교회이다. 이러할 때 누구의 교회가 아니라 모두의 교회가 되고, 그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신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의 분별은 무엇을 말하는지, 2천 년전 예루살렘에서 소집된 공의회를 다시 한 번 찾아가 보자. 정확히 주후 49년이고,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17년 후의 일이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행 15:6-13,15,22,25).

예루살렘과 480km 떨어진 안디옥 교회가 시끄럽다. 로마 제국 당시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였고, 선교적으로는 이방 선교의 중심 기지의 역할을 하던 안디옥에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바나바가 정착하면서부터 안디옥에 흩어져 있었던 믿음의 형제자매들은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으며(행 11:26), 바나바에 의해 바울이 이 교회로 불려오면서 그 세가 확장된다(행 11:26).

기독교사에 의하면, 당시 안디옥 교회의 교인수가 10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커진 안디옥 교회 안에 유대인과 헬라인이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에 같이 있다는 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봤듯이, 단순한 예배공동체로서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같이 나눈다(행 2:42-46)는 것이고,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는 ‘할례’나 ‘식탁의 문제(정결성)’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디옥은 스데반의 죽음으로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첫 씨를 뿌린 지역이었으나 이곳에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행 11:21),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였다. 어느날 “유대로부터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안디옥의 형제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행 15:1)라고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터진다. 그동안 두 인종 그룹 사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과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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