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 됨을 크게 깨달을수록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커진다."

로고스 채플 강단 (9)

예수님 다음으로 세상에서 죄와 거리가 먼 사람은 누구일까? 알려진 사람 중에는 사도 바울이 아닐까 한다. 그리스도인에 대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롬 6:11)라고 했듯이, 사도 바울은 죄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고백한다. 바울은 이 부분을 현재형 동사인 헬라어 ‘에이미’ 즉 ‘~이다’로 적어 후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사도 바울이 사역 후반기에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하여, 마치 그가 큰 죄를 저지른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과장된 형식적 표현으로 ‘내가 괴수들의 무리에 속해 있다.’라든가 ‘내가 역사적으로 첫번째 괴수이다.’라는 표현일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나는 ~이다”라는 말의 헬라어 ‘에고 에이미’를 상대적으로 적용하여 ‘나는 가장 나쁜 죄인이다.’라는 말 그대로 고백하였다.

그러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한 사도 바울이 왜 이런 고백을 했을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였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요일 1:10)라며 죄를 범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했고, 야고보서 2장 10절도 율법 하나를 범해도 모두 범한 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죄인”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묻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므로, 의사가 있어야 할 곳은 병자들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오셨기에,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바리새인도 죄인인데,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니까 예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죄에 대해 무감각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코끼리의 발바닥에는 굳은 살이 두껍게 덮여 있어, 못이 박혀도 아무 느낌이 없다고 한다. 반면, 손톱이 빠져서 드러난 속살은 조금만 건드려도 기겁할 정도로 민감하다. 마찬가지로 양심에 굳은 살이 두껍게 덮여 있으면 죄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고, 자신이 죄를 지은 죄인임을 알지 못하기에 스스로 의롭게 여기어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누차 그들의 외식을 질타하시고,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고 온갖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할 정도의 죄인들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했다.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죄인들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가 있다.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고백한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기도했다. 

성경은 두 사람 중에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모두 죄인이지만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죄인임을 고백하고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이다. 

다윗 왕과 나단 선지자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 지은 통회의 시이다.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충직한 용사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죽게 했을 때, 나단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새끼 양을 빼앗은 비유로 그의 죄목을 지적했다(삼하 12:1-4). 이 보고를 들은 다윗 왕은 나단에게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라고 말했고, 이때 나단은 다윗 왕을 향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라고 대답한 후,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예언했다(삼하 12:1-15). 

다윗도 다른 왕들처럼 강력한 권력으로 밧세바를 취하고 나단이 죄를 지적하기 전까지 회개하지 않았다. 다른 왕들처럼 묵과하거나 스스로 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의 말년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다”(왕상 11:14)에서 보듯이, 후궁 700명, 첩 300명인 상황에서 그들의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진노하시며 우상을 버리라고 했어도 솔로몬이 순종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말한 대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없이는,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하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다. 바울의 이 고백은 과장이나 형식적인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죄를 짓고 있다는 말도 아니다. 철저히 죄인임을 깨달아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고백한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은 그의 서신서 곳곳에 나온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과거의 죄이지만 현재에도 철저히 죄인임을 깨달아, 스스로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나 된 것임을 고백한다(고전 15:10). 

그는 죄인 중에도 가장 큰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 된 것과 가장 큰 죄인이기에 은혜 또한 가장 크게 입었음을 고백하며,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나타내고 있다. 죄인 됨을 크게 깨달을수록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커지는 것이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면서,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사도 바울은 지속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항상 큰 죄인이라는 걸 깨닫고, 항상 예수님께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기에, 용서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큰 죄인이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깨달음의 크기 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과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구원하신 그 큰 은혜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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