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그가 나타나시리라 하더라” (창 22:14, 필자역)

 

창세기 22장 14절에 나타난 ‘여호와 이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여호와 이레’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무언가 예비되었거나 예비되길 바랄 때 적용한다. 이는 사람이 중심되는 해석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적 판례를 낳은 원인은 여러 영어성경들(NIV, NAS, ESV-The LORD Will Provide)이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런 번역들은 마치 하나님이 무언가를 공급해 주실 것처럼 해석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여호와 이레’는 우리를 위해 무언가 예비되었거나 예비되길 바랄 때 쉽게 사용된다. ‘문맥에서 해석한 번역이기에 맞겠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문맥은 Messianic Texts 중에 한 본문이다. 다시 말해, 메시아에 대한 직접적 예언을 담고 있는 본문이므로 번역과 해석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경 히브리어 구문을 무시하고 읽으면, 여러 영어 성경들처럼 “The LORD Will Provide(주님이 공급하실 것이다)”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4절 상반절(14a)에 나타난‘여호와 이레’는 구문을 떼어놓고 읽을 수 없는 본문이다. 상반절(14a)의“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에서 ‘그 땅 이름을’은 목적어이고‘여호와 이레’는 목적 보어이다. 목적 보어(여호와 이레)는 그 땅의 고유한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시제나 시상과 상관없이‘여호와 이레( יהוה יראה)’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런 고유명사를 잘 살린 역본은 KJV, JPS Tanakh, 그리고 한글 성경의 상반절(14a)이다. 번역이 매끄럽다. 그리고 시제와 시상을 살렸어도 영어 성경들(NIV, NAS, ESV)처럼 읽기보다, 문자적으로는 “the Lord, He will appear (주님, 그가 나타나시리라)”로 읽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호와 이레’는 목적 보어로 고유명사화된 것으로 읽어야 한다. 맛소라 텍스트(MT)를 현대영어로 번역한 ‘타나크’(JPS Tanakh)도 고유명사 ‘Adonai-yireh’ (아도나이 이레)로 번역했다. 

영어 역본 상반절(14a)의‘provide(공급하다)’동사는 아마도 히브리어 동사(ראה)에 대한 잘못된 문맥적 해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문맥에서 하나님이 ‘숫양’을 예비하셨으므로, ‘provide’라고 번역해도 문맥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동사의 원뜻인 ‘보다(ראה)’라는 의미를 왜곡시킨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하나님이 준비한 숫양을 보았다. 숫양에게서 숫양만 보았을까? 더 큰 것을 보았을 것이다. 앞으로 오실 대속의 주님을 믿음으로 본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그의 믿음은 창세기 22장의 넓은 문맥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또한, 신약성경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먼저 22장 5절에서 함께했던 종들을 머물게 하며 아브라함은 ‘우리(1인칭 복수)’가 함께 돌아오리라고 말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믿음으로 본 것이다. 종들에게 말하는 시점은 이삭이 제물로 바쳐지기 전이고, 제사 이후에 이삭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다. 

다음으로 히브리서도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다시 살려 주실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다(히 11:19)고 증거하고 있다. 다시 본문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이 번제될 양을 찾을 때,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위한 한 양을 번제물로 보실 것이다”(22:8, 필자역)라고 말했던 분이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했고, 숫양을 보았고, 숫양을 넘어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위한 독생자를 번제물로 준비하시는 것을 보았을지 모른다. 미래에 대속할 주님이 오실 것에 대한 믿음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모세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믿어진 바이다. 이것을 하반절(14b)에 기록하고 있다.

하반절(14b)은 모세와 동시대 사람들이 상반절(14a)에 있는 ‘여호와 이레’라는 고유명사를 신앙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모세와 그 시대의 사람들도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반절(14b)은 미래 시제/미완료 시상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세와 당시 사람들도 아브라함처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반절(14b)에 있는 수동태 동사(יֵרָאֶה : to be seen or to be appeared)의 3인칭 단수 주어만으로는 숫양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 때에도 모세 시대에도 기다려서 아직 보지 못한 것은 숫양이 아니라 분명 사람일 것이다. 대속의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신약성경 탄생 전, 구약을 번역한 칠십인역은 이 동사의 주어를 분명히‘주님(Κύριος)’으로 따로 또렷하게 표시해 주고 있다. 

영어 성경과 더불어 한글 성경도‘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로 번역한다. 주어도 없이 번역된 한글 성경은 영어 성경보다 더 애매한 것이 사실이고, 이 애매한 번역은 성도들의 입에서 실루엣같이 포장된 말을 낳게 한다. 따라서 이 하반절(14b)은 뭔가가 준비되거나 공급될 것처럼 의역하기보다는,‘여호와의 산에서 그가 나타나시리라(יֵרָאֶה)’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바울이 말씀한 아람어인‘마라나타(μαράνα θά = מרן אתא = our Lord has come)’라는 단어를 기억하는가! 그렇게 여호와의 산에 나타나실 주님을 기다리던 고린도 교회에“우리 주님이 오셨다(마라나타)”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런“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바울은 말한다(고전 16:22, 필자역). 이처럼 아브라함과 더불어 모세와 그 후에 많은 사람이 여호와의 산에서 대속의 주님이 나타나실 것을 믿었다. 결국 바울은 그 여호와의 산에 대속의 주님이 오셨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창세기 22장 상반절(14a)은 ‘여호와 이레’로, 하반절(14b)은‘그가(주님) 나타나실 것이다’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 이런 해석이 대속의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유익하다. 

* 편집자 주: 최창호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및 칼빈신학교에서 고대 근동어문학으로 Th.M. 학위 취득 후, 현재 남침례신학교에서 구약학으로 Ph.D. 과정 중이다. ‘생명의 삶 +PLUS’ 구약 원어 묵상 필자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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