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는 세상을 교회와 분리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사들이 티브이도 보지 못하게 하고 신자들을 교회에만 묶어두려 한다. 어떤 목사는 주일 일과 후에 티브이를 보는 자신을 질타하는 글을 영적인 일기라고 게재한 것도 보았다. 그런데 티브이 안 보는 게 정말 영적인 일인가. 나는 티브이나 영화 드라마는 물론 소설과 같은 책을 보지 않는 목사는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성서와 신문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신문은 거의 사장되었다. 나는 신문 대신 티브이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도 열심히 보라고 권한다. 드라마 작가가 목사보다 더 영적인 경우는 너무도 흔하다.

세상을 보지 않는 신앙은 한 마디로 거짓이다. 세상을 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세상을 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항상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언급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명료하게 요약해 주셨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는 말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 아닌가. 결국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에 의해 입증된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이 말씀은 더욱 세세하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형제나 자매와 반목해서는 안 된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 행위도 형제나 자매와 원한을 품은 상태라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의 모든 행동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라는 것인가.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그것을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을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하늘과 땅이 만난다. 땅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일터이다.

세상은 이처럼 모든 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무대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벽을 쌓으면 어떻게 되는가. 간단하다. 오늘날의 교회처럼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자기들끼리 종교놀이를 한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이 말씀도 그냥 하지 않으셨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그리스도인들)에게 더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필요이다.

성서를 잘 보라. 하나님과 세상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예는 거의 모든 경우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 그런데 가서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삼아야 한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결국 관계의 형성이다. 제자를 삼으면 그 사람이 누가 되는가. 자매와 형제가 되지 않는가. 결국 세상을 자매와 형제들로 채우라는 것이다. 세상은 결코 신앙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세상은 우리가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 무대이며 변화시켜야 할 것은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이다.

그래서 세상의 고통은 그리스도인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의 고통은 우연히 혹은 어쩔 수 없이 오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체제가 된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세상은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악이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고통은 그 체제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 교리라고 말하는 것조차 불편하다. 사회적 교리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책임은 본질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사회적 교리는 따로 없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예를 다한 후에 영적으로 성숙한 이후에 하거나 어떤 예언자들에게 할당된 특별한 사명이 아니다.

내가 돈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일이고 돈을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돈의 경우에도 신앙과 세상이 분리되지 않는다. 아니 신앙과 세상이 분리되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신앙이 정치보다 중요한 것이다. 신앙은 세상을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충만한 곳이 되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신앙이 교회 안에 갇히면 ‘구원 타령’이나 하다 모든 신앙의 기회를 소모하게 만든다. 그곳에서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찬양해 보라.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이 찬양을 받으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사역을 완성하는 임무를 인간에게 맡기셨다. 그 완성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된다. 교회는 다른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가 된다. 자기를 부인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위해 살게 되는 경우는 없다. 자기를 부인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는 한층 더 이타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 교회가 커지는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은 사단의 하수인일 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돈과 세상에서 판가름 난다. 돈을 미워하는 행위로 거대한 악의 체제인 세상을 드러내고 붕괴시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며 구원의 과정이며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그러므로 희생의 체제인 세상 속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희망이 되어 주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티브이를 보라.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을 보라. 역사와 철학도 공부하라. 성서의 내용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달라진 복음을 실천할 때 당신 주변에서 하나님 나라의 여명이 밝아올 것이다. 그 빛 안에서 돈과 세상이 더욱 달라 보일 것이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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