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사랑으로 돌보며 느끼는 그 맛을 알기나 할까?"

 

심술궂은 겨울이 물러갈 때가 된 4월 중순에도 물러갈 줄 모르고 질척거리다가, 온실 안에서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싱그러운 봄이 왔다고 기지개를 켜고 있는 머루 덩굴과 새로 돋아난 부추 그리고 호박 떡잎 귀여운 새순을 모질게 짓밟아 얼려 놓고 떠났다.

이곳은 지대가 약간 높고 깊은 산악지역이어서 추위가 빨리 찾아오고 동장군이 물러갈 때도 다른 곳보다 늦게까지 심술을 부리다가 떠날 때가 많다. 올해 봄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깥 세상보다 따스한 온실 속에서 방금 올라온 각종 새싹을 심술궂게 짓뭉개서 끝이 누렇게 타들어 간다. 한국에서 머나먼 미국으로 시집온 진달래꽃은 봄이 왔다고 연분홍 얇은 치마를 입고 나왔다가 꽃잎이 누렇게 얼어 떨어지고 말았다.

귀엽고 여리디여린 새싹이 흙을 밀치고 올라오는, 생명이 탄생하는 모습은 신비롭기만 하다. 부지런 떨면서 2월 하순에 뿌린 각종 채소 씨앗들은 너무 일찍 심었는지 나올 기색이 없다. 할 수 없이 다시 씨앗을 심고 매일 물을 뿌려 주고 사랑으로 돌보았더니, 상추, 쑥갓, 호박, 오이, 나팔꽃, 분꽃, 작약, 목단, 금낭화 등등 각종 채소와 화초 그리고 금전초, 갓, 부추, 머위,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뽕나무, 사과나무, 감나무, 밤나무, 포도나무, 자두나무, 체리나무, 단풍나무, 으름 덩굴, 하수오 덩굴과 내가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두릅 나무순도 나와서 재롱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서보다 맘껏 먹을 수 있는 두릅나물은 이 지역 기후와도 잘 맞고 미각도 사로잡아 나를 기쁘게 해준다.

밭에서는 싱싱하게 겨울을 난 대파, 쪽파, 마늘이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란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돼지감자가 방긋이 고개를 내밀고 인사한다. 지난 가을에 씨를 뿌려 놓았던 상추가 모진 겨울을 나고 이른 봄부터 효자 노릇을 한다. 월동한 이른 봄의 상추는 보약과 같은 존재감을 나타낸다. 6개의 커다란 화분에 모종해서 키운 돌나물이 마치 콩나물시루에서 자라는 것같이 싱그럽고 풍성한 찬거리를 제공해 준다.

우리 밭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곰취나물은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가장 골치 아픈 존재이다. 산나물 중에 으뜸이 취나물이라 하는데, 곰취는 그중에 나물의 제왕이라는 말이 있다. 먼저 살던 분이 심어 놓았는지 몇 포기가 자라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온 밭을 제패할 기세이다. 이른 봄, 잎이 나오기 전에 노란 꽃을 피우고 며칠 후에는 마치 민들레꽃같이 낙하산을 타고 온통 씨를 흩날린다. 또한 뿌리가 한없이 뻗어 새끼를 치고, 숙주나물 같은 뿌리는 너무 쉽게 부러지는데, 그 마디마다 새순이 돋아나서 완전히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봄 한철 즐기는 다른 산나물과 달리 봄부터 가을까지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난해 봄, 길 건너 이웃집에서 두어 가지 꺾어다 토막을 내어 심은 수국꽃 나무가 모두 살아서 10여 그루가 되었다. 올여름에는 시원한 수국꽃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종류의 다년생 꽃들이 가을에 줄기가 마르고 성장을 멈추었다가 새봄이 되었다고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새싹을 볼 때마다 반갑고 경이로워서 온종일 텃밭을 돌아보며 가꾸는 것이 즐겁다.

지난해 봄, 잔디밭에서 근근이 살고 있는 딸기 몇 포기를 찾아내어, 밭에 옮겨 심고 가꾸었더니 탐스럽고 맛있는 딸기가 열렸다. 아마도 몇 해 전에 살던 분이 가꾸던 것이 도망쳐서 잔디밭에 뿌리를 내리고 고생했던 것 같다. 기름진 밭에 옮겨심고 가꾼 데 대한 보답인지 탐스럽게 열매 맺는 것을 본 후 올해에는 100여 포기로 증식시켜서 네 곳에 딸기밭을 만들어 놓고 돌보는데, 이른 봄부터 하얀 꽃을 피워대며 왕성하게 자란다. 일반적으로 딸기는 봄부터 초여름에 수확하는 것인데 이 품종은 봄부터 서리가 내리는 가을까지 수확할 수 있는 연중 딸기 종류라서 기대가 된다.

원래 희망은 돈으로 살 수 없고,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속에 있는데,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설정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각할 때 희망은 내 것이 되는 것 같다. 까짓것 사다 먹으면 되지 귀찮게 키우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맛볼 수 없는 나만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사랑으로 돌보며 느끼는 그 맛을 알기나 할까?

 

"Lumber Capital of the World"라고 쓰여진 간판이 이 지역을 들어오는 고속도로 가에 서 있는데, 몇 시간을 달려도 미송과 백향목이 끝없이 펼쳐진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울창한 숲은 목재의 중심지임을 실감하게 한다. 만년설 고깔모자를 머리에 쓴 웅장하고 깊은 산자락은 목재뿐만 아니라, 각종 진귀한 토산물과 야생동물로 유명하고, 계곡마다 연어 송어 등 각종 물고기가 우글거리는 낚시의 명소들이 많이 있어서 강태공들을 흥분하게 한다.

깊은 산골을 지나는 고속도로 가에 2.5에이커의 넓은 땅을 주셔서 가게와 작은 살림집이 있고 목재를 가득 실은 대형 트럭들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땅 한 켠에는 작은 개울물이 흐르고 물 턱이 있어서 졸졸졸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아내와 나는 폭포라고 부르며 좋아한다. 가득한 잡목을 베어내고 밤나무를 심었는데 2-3년 후에는 알밤을 기대해 본다.

2년 전까지 10여 년 동안 살았던 밴쿠버 지역에서 고생하며 편의점을 운영할 때, 주위에 많은 무숙자가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 약간의 도움을 베풀었더니, 소문이 나서 무숙자들이 더 많이 몰려오고 가게 주위를 지저분하게 한다고 건물주가 리스를 연장해 주지 않아서, 권리금을 많이 주고 산 가게에서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곳으로 옮겨 주셔서 화려한 공작새 8마리의 재롱을 구경하고, 십여 마리의 토종닭과 두 마리 오리들이 제공하는 무공해 알과 각종 채소를 나누고, 화초와 과일나무들을 예쁘게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두를 돌보고 즐기며 살 수 있도록 베푸신 은혜가 무한 감사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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