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어쩌랴.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것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순수한 사람이다. ‘순수(純粹)’란 말에서 보듯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말뜻대로 ‘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음.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철저히 ‘사람 됨’을 일컫는 말이다. 모름지기 ‘순수’의 지향점은 우리 삶의 ‘초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났다. 빈 자리가 아니라 빈 가슴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참 순수하게 다가왔고 그렇게 가까웠던 사람이다. 동료이지만 내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던 그였다. 그는 떠나면서도 마지막 날까지 자기 일을 다했다. 요령 피우지도 않았다. 은근히 자기 욕심을 드러낼 법도 하거늘 뒷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그에게 차라리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고 싶었다.

언젠가 나는 동료들 앞에서 선배 자격으로 ‘따뜻한 사람, 분명한 사람, 깔끔한 사람’을 주장했다. 하긴 법 집행이라는 견고한 목적을 수행하는 제복 관리가 이런 모습을 갖추기엔 한계가 있다. 나 자신이 이런 모델을 꿈꾸어 왔지만 늘 부족함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을 꿈꾸어야만 내 양심에 대한 최소한 도리인 것처럼 여겨진다. 행동으로 순수함이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또 겸손한 사람이 좋다. 아무래도 남보다 우월한 장점이 많으면 겸손과 멀어지기 십상이다. 키 큰 사람이 응당 작은 사람을 내려다보는 원리다. 그럴수록 겸손은 내면의 의지와 밀접한 덕목이다. 말과 행실이 겸손해야 한다. 내 곁을 떠난 그는 참 겸손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천연하게 웃는 그에게 나는 내 겸손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게 더 미안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주 웃는 사람이다. 따뜻한 마음은 웃는 얼굴에 드러난다. 웃고 있는 그가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의 베풂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은 원죄처럼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데 그는 웃음만큼 나누고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성숙한 아이덴티티(identity)를 발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주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 주는 그였다. 그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돌아보는 일이 그랬다. 이렇게 그를 말하면 너무 추상적인 이념에 머물렀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행동 기준으로 이념과 표어만 내세워서는 아니 되는 까닭도 마음에 둘 일이다. 하지만 아주 작은 일 하나에도 순수함으로 채울 수 있다면 이미 그는 순수한 사람이다.

생각하건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선택은 내가 아니라 너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무겁다. 무거움을 가볍게 하는 일이 남은 삶의 숙제이다. 피할 수 없는 너와 나의 진실이다.

“주님의 교훈은 정직하여서 마음에 기쁨을 안겨주고, 주님의 계명은 순수하여서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시편 19:8,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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