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 (30)

박준형 칼럼니스트(캐나다)

나(저자)의 고백

내 이야기로 이 분별의 긴 여정을 마칠까 한다. 나는 태생적으로‘권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불순종의 피’가 내게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부친은 일제시대 때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하셨다. 그리고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어릴 적 순진했던 이름을 쇠망치 추(鎚), 외자로 바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박추라는 성명을 호적에 올린 독특한 분이시다. 부친은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 몸 담으셨지만 얼마 되지않아 정치쪽으로 선회하셨다. 그 이후 우리 가정은 파란만장한 굴곡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60~70년대 인생패자들의 집합소인 산동네 ‘상계동’으로 이사한 덕분에 나는 소위 그 찌질했던 상계동 출신이 된다. 당시 상계동 주민들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상계동 탈출’이었다. 

시장통에서는 매일 깡패들의 칼부림이 나고, 우리 집에선 아버지가 바람나고, 옆집에는 굿판이 벌어지고, 동네 밖 야산에는 시너를 몸에 뿌리고 인생을 마감해 버리는 인생비관주의자들이 있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호락호락하도록 키워지지 않았다. 부유하고 권위 있는 자들에 대한 근거 없는 저항이 늘 나의 양심을 괴롭혔다. 

80년대에는 대학생활을 한다. 무엇을 배웠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채 대기업에 입사한다. 어려서는 가장 가난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다면, 이제 세상에서는 가장 기업체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하지만 이런 성장 과정에서 지워지지 않는 나의 유전자는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빗 소로가 『시민 불복종』이란 책을 썼다는 사실도 모르고 자랐지만 나는 태생이 불복종과 친했다. 젊음의 피가 솟구칠 때는 ‘쿨’해 보여서 마구 그랬지만, 소위 교회의 문턱을 넘어다니면서는 세상과 철저히 분리된 교회를 보면서 이랬고, 교회는 세상의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목사가 가장 정치적인 행사에 얼굴 한 번 내밀기를 학수고대하는 것을 알고 나서 더더욱 나의 불순종의 피는 거꾸로 솟았다.

나는 그 어떤 권위도 색안경을 끼고 보았으며 거부했다. 잘 나가던 회사를 때려치운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얼마 전 생을 달리한 미국의 영웅 무하마드 알리가 백인들을 위한 챔피언은 되지 않겠다며 금메달을 허드슨 강에 던져버렸듯이, 나 역시‘ 그들만의 잔치’에 내가 들러리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잘 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2000년에 가족과 함께 덜컥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런 내가 지난 20년간 북미에서 살아오면서 신앙적으로 가장 많이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다. 신앙의 눈을 통해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것은 무조건 권위를 인정하기 싫어하고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어떤 권위인지 ‘분별’하지도 않은 채 ‘권’자만 나오면 싫어했다. 그러면 나는 반권위적이었던가? 탈권위적이었던가? 아니다. 도리어 내가 가장 권위적인 괴물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대학교 때 수학여행을 같이 갔던 여학생들이 지어준 ‘카리스마 박’이란 별명이 수많은 인고의 생활 속에서 그 원래의 성경적인 의미인 ‘은혜스러움’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도리어 성질이 못 됐다는 의미로 왜곡됐다. 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어떤 일이든 나의 판단에 맞으면 하고, 아니다 싶으면 거부했다. 

2004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교회 성장보다는 세상과의 화해와 정의를 신경 쓰는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인이 되면서, 외적으로는 영리 추구에서 비영리 추구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제3국의 어린이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지막으로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마음먹으면서, 그리고 내적으로는 공지영의 『수도원기행』처럼 나의 영적인 탐구와 여정이 현실화되면서, 가장 폐쇄적인 수도원에서 가장 자유로운 수도승의 삶과 영성을 배우면서, “내가 누구한테 영적인 지도를 받아?”라고 뻗대다 그들을 도리어 스승 삼아 그들의 겸손함을 배우면서, 가장 낮은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자들을 만나면서, 나의 삶은 서서히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권위에 대한 불복종에서 복종으로, 공동체에 대한 불신에서 신뢰로 바뀌어갔다. 이런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두 가지는 첫째, 내가 하나님을 오해하고(잘못 알고) 살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나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별볼일 없어지니 나보다 못한 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괴수 중에 괴수 아닌가?”

드디어 나의 문제들을 교회 및 공동체와 상의하는 겸손이 싹텄다. 자녀 문제를 교회 및 공동체와 상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와 아내의 삶(그것이 죽음이든 삶이든) 대해 교회 및 공동체와 상의하기 시작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 공의회 한가운데 서 있는 바울처럼, 나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잘못이 있다면 교정 받고, 올바르다면 공동체로부터 확증 받기 원하며, 공동체의 결정에 따른 삶을 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순화(그래, 성화가 더 적절할 것 같다!)과정은 오늘 이 시각에도 진행 중이다. 변화가 평생의 숙제이듯이,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평생 떨어졌겠듯이, 나의 유전자에서 ‘권위에 대한 불복종’의 잔재가 빠져나가는 데에도 남은 평생이 소요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실망하거나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분별하는 ‘사랑의 공동체’, ‘격려하고 위로하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교회 근처에서 살아야 한다고 침 튀기면서 부르짖는 이유이다. 교회가 곧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집을 고를 때 조건이, 교회에서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전통파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공동체의 참 의미를 알려준 세계적인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의 창립자 장 바니에, 가장 낮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살아간 주님의 종이자 많은 이들의 영적 스승인 헨리 나우웬을 하버드 대학에서 토론토의 지적장애 공동체 데이브레이크로 ‘끌어내린’ 장본인, 그의 조언보다 더 좋은 마무리는 없을 것 같다.

“한 공동체가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공동체 생활은 여전히 어려움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와 내적 저항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중 받지 못하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 두려움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기쁨과 정화의 시간을 통해 지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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