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즐겨 부르는 찬양은 ‘마음이 상한 자를(He binds the Broken Hearted)’이다. 예전부터 즐겨 듣던 찬양이지만 코로나 팬데믹 시간을 보내며 내 마음속에 더 깊은 울림과 위로를 주고, 나를 기도로 이끈 찬양이다. 

목회자 관점에서 2020년, 그리고  2021년은 영원히 잊지 못할 해가 될 것 같다. 2020년 봄 코로나바이러스가 미국에 있는 이들에게 실제적 위협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때는 교회력으로 중요한 기간인 총 일곱 주의 부활 절기와 맞물려 있었다. 부활 절기는 죽음과 생명에 대해 묵상하는 기간으로 ‘죽음’보다는 죽음을 극복한 ‘생명’에 무게가 더 쏠린다.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

하지만 작년과 올해 부활 절기에는 그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생명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선포하기가 쉽지 않았다. 생명과 기쁨보다 염려와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분들의 슬픔이 더 가깝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다양한 모습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시기에 부활이 전해주는 ‘생명’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참 어려운 숙제 같았다. 그러던 중에 시 한 편을 읽게 되었다. 윤동주 시인이 쓴 ‘팔복’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팔복 선언에는 여덟 부류의 각기 다른 사람이 등장하는데, 윤동주는 모두 슬퍼하는 자로 표현한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성서 본문에서는 “슬퍼하는 자는(애통하는 자)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 선언을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로 바꾸었다는 점이 의아했다. 어떤 이는 이 시가 예수님의 팔복 말씀을 비꼬거나 인간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의 의도는 비꼬는 것도 아니고 냉소도 아니다. 윤동주 시인은 슬퍼하는 자들에게 당신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그러한 선언은 쉽고 얄팍한 위로일 뿐이라고 시인은 생각했던 것 같다. 윤동주 평전 ‘처음’의 저자 김응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시대의 깊은 슬픔을 마주했던 시인은 “얄팍한 위로보다 몸으로 슬픔에 맞서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슬픔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정면으로 부닥치는 초월(기어이 넘어감)의 신앙을 윤동주가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윤동주는 영원히 슬플 것이라는 표현으로 자신도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더 선명하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마주하며 나는 어떤 생명을 소망해야 할까? 윤동주의 시를 읽은 후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얄팍한 위로나 값싼 은혜의 설교보다는 슬픔을 벗하며 함께 울고, 기쁨을 벗하며 함께 웃는 삶을 살아야겠다. 그리고 이 다짐과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찬양을 부르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우리와 이별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나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그 수많은 생명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들의 잔을 채워주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더 깊이 슬퍼하고, 더 많이 아파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슬픔과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죽음의 힘에 맞서 싸우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그렇게 생명을 나누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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