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나의 목회 (마지막)

 

주의 길을 가겠다고 신학 공부를 마치고 교회를 개척할 당시만 해도 목회가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정말 좋아서, 재미있고 감사해서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목회를 하면 할수록 어렵다. 힘들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회는 살얼음판이라 어디에서 어떻게 깨질지 모른다. 목회는 지뢰밭이라 어디에서 어떻게 터질지 모른다.”라던 선배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는 그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어떤 모양으로든 목회 현장에서 연약함과 부족함과 실수와 미숙함의 연속을 체험하고서야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면서, 아픔과 실패는 성장을 위한 통증임을 깨닫습니다. 

오죽하면 “성도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목회자는 씹히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더 낮아지고 부드러워져 주님의 섬김을 본받으라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회는 늘 분별력을 가지고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목회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목회에는 성공도 실패도 없습니다. 그저 순종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뿐입니다. 혼자선 너무 힘들기에 성령님을 의지하며 함께 동역해야 함을 조금씩 깨닫습니다. 그것이 하면 할수록 힘이 나고, 쉽고, 재미있는  목회의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아직 가보지 않은 시간을 여행합니다. 무슨 일을 만날지 어떤 복병을 만날지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르지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순종뿐입니다. 그저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언제나 승리를 외칩니다. 목회하면 할수록 “재미있다.”라고 고백하면서, 찬송과 간증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성령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2018년 1월 26일, 말씀을 전하려고 일산에 있는 교회에 도착했는데, 교회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을 찍겠다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움푹 파인 곳에 발을 헛디뎌 그 자리에 쓰러지며 기절했습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잠시 후 깨어나 보니 자동차 안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려던 교회의 부목사님과 장로님이 쓰러진 나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낙상 사고로 안경이 깨지면서 오른쪽 겉눈썹이 깊이 파였고 안구 뼈가 3곳이나 부러지고 오른쪽 볼이 찢어져, CT 촬영을 하고 오른쪽 겉눈썹부터 볼까지 거의 60바늘이나 꿰맸습니다. 

부상은 당했지만 감사한 일 투성이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러 가다가 교회 앞에서 넘어져 쉽게 발견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인적 없는 곳에서 넘어졌다면 많은 피를 흘리고 기절해 있던 저를 누가 병원에 데려갈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하니 그저 감사했습니다. 빨리 발견되어 병원으로 간 것에 감사, 안경이 깨졌는데 눈 안 다친 것에 감사, 머리 안 다친 것에 감사, 치아 안 다친 것에 감사, 평소에 복된 만남, 관계 속의 승리를 강조하면서 미국 생활 30년간 인연을 맺은 한국의 지인들이 병문안을 와서 기도해 주시니 감사, 가족이 병원에 올 수 없는 상황인데도 혼자 외롭지 않게 하심에 감사, 5인 병실에서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했습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선배 목사님이 심방을 와서 “이제 윤 목사 조폭 전도하기 좋겠다. 얼굴에 흉터도 있고!”라고 농담을 하셔서 함께 웃었습니다. 그래, 이것이 예수 복음을 전하다가 만들어진 상흔이라면, 그 자체에 감사할 뿐입니다.

무슨 일이든 한 자리에서 그 일을 10년 이상 한 사람에게는 머리를 숙이라고 했습니다. 또 무슨 일이든 한 자리에서 20년 이상 한 사람에게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한 자리에서 30년 이상 사람에게는 무릎을 꿇으라고 했습니다. 10년, 20년, 30년간 한 자리에서 묵묵히 충성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겠습니까? 기분 나쁘다고, 남들이 알아 주지 않는다고 그만둔다면 이루어낼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 교회를 오래  섬긴다는 일이 감사할 일이건만, ‘힘들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교회를 밥 먹듯이 옮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여기뿐인가?”라면서 정작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믿음도 자라지 못하고 신앙의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워도, 누가 뭐라고 해도 바로 교회 옮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신앙인이라면 어떻게 인정을 받겠습니까? 교회를 자주 옮기는 분들의 신앙이 어떻게 자라며, 자녀들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자녀에게 물려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성인 아이 신앙은 아닌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승리하는 신앙을 통해 먼저 무릎 꿇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필요한 일꾼들을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있게 하시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떠나가게 하십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싶은, 연약한 주의 종의 모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주정부 등록을 하기 위해 영문 교회 정관이 필요했습니다. 일반적인 서류 준비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교회 정관을 영문으로 번역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남편이 미국인 변호사인 집사님이 교회에 출석하여 주 정부에 등록하는 서류 업무를 도와 주고 얼마 안 있다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얼 고트(Earl Gott)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했을 때부터 함께하신 분입니다. 10년 동안 겨울에 주차장의 눈 치우는 일을 비롯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내가 너무 힘들어 보이면 밥을 사주셨으며, 한인교회 목회나 미국교회 목회나 똑같다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암 투병을 하실 때에도 지인들에게 저를 담임목사라고 소개하며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알래스카를 떠나 자식 있는 곳에 가셔서 임종하신 순간까지 내게는 잊지 못할 영적 멘토이며 동역자였습니다. 

아들을 잃고 성도님들이 떠나 교회 재정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하나님은 전체 인구가 3천 명뿐이고 나무 한 그루 없고 겨울철에 물을 뿌리면 바로 얼어버린다는, 알래스카에서도 가장 북쪽인 베로(Barrow)에서 20여 년 식당을 경영하시던 백혜순 권사님 가정을 보내 주셔서, 자주 장사 루디아처럼 교회에 필요한 물질을 채워 주셨습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협력 사역은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신앙의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처럼(로마서 16장), 내게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함께해 온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들과 협력하며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형과 형수임에도 불구하고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헌신하신 윤요한 장로님과 윤숙자 권사님, 개척 때부터 함께한 동역자 김복선 권사님 그리고 끝까지 가겠다며 궂은 일을 감당하며 청년들을 보살피는 민경수 안수집사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어 주고 함께했기에 지금껏 주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적 은혜를 사모합니다. 지금까지 체험한 고통은 산 자의 몫이라는 은혜를 경험하고, 연단을 통해 더 큰 은혜를 예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며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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