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원어 이야기 (4)

‘방주(תֵּבָה)’라는 단어는 성경의 두 곳에서 사용되었다. 하나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תֵּבָה)를 만들라(창 6:14)고 명령한 후, 창세기 6~9장에 걸쳐 23회 정도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이 방주를 통해서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길 원하셨고 이것을 노아에게 언약하신다(창 6:18). 다른 한 곳은 출애굽기 2장 3절에서 요게벳(출 6:20; 민 26:59)이 갈대 상자(תֵּבָה)를 가져다가 모세를 구원할 때 사용하였다. 

미국 민속화가 에드워드 힉스의 '노아의 방주'

여기서 독자들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왜 이 두 사건에 사용된 도구들이 각각 방주와 갈대 상자로 다른데 같은 단어를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용된 목재도 다르다. 방주를 위해선 고퍼 목재(Gopher)가 사용되었고, 갈대 상자를 위해선 당시 나일강 유역에 흔히 있는 파피루스(papyrus)를 엮어서 만들었다.

방수 처리에 사용된 물질도 각각 다르다. 방주를 위해선 나무진(כֹּפֶר: pitch)을 안팎으로 칠했고, 갈대 상자를 위해선 역청(חֵמָר: Bitumen or Asphalt)과 진(זֶפֶת: pitch)을 발랐다. 그 크기도 달랐다. 방주는 축구장보다 조금 더 긴 140m에 가까웠을 것이고(창 6:15), 갈대 상자는 겨우 1m 남짓했을 것이다. 물에 띄워야 한다는 공통점 외에는 방주와 갈대 상자에 같은 이름을 붙일 아무런 이유가 없다. 왜 같은 이름을 사용했을까?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사르곤’대왕 탄생 설화에 엮여 있다. 그는 이사야에 나타나는 앗수르 왕‘사르곤’II(722~705 BC)와는 다른 인물이다. 그는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첫 번째 왕이다(2334~2279 BC). 쐐기문자(설형문자)로 기록된 그의 탄생 설화는 모세의 탄생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면이 있다.

그는 여사제의 아들로 태어난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여사제인 어머니의 비정한 손에 의해 유브라데 강에 버려지고, 물긷는 자(혹은 정원사)의 손에 건져져서 나중에 왕이 된다. 왕이 되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하는 대왕이 된다. 그가‘사르곤’I세이다. 사제 집안에서 태어났고, 물에 버려졌고, 다른 사람의 손에 길러졌고, 그리고 지도자가 되었다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때문에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모세와 견주었다. 그들은 모세 이야기도 아르곤의 설화처럼 취급하려고 한다. 아니면 그저 역사적인 모세의 탄생 이야기 정도에 머물고 만다. 하지만 성경은 일반 설화나 역사서와는 달리 통일성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차이가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이다. 일반 역사나 설화나 신화에서는 신이 없거나 그 신들이 시대마다 바뀐다. 그리고 그 신탁들에서는 일관성이나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바뀌는 경우도 없고, 그의 명령이나 신탁이 항상 일관되고 통일성을 유지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다. 이것은 세상 신화나 설화 그리고 세상 역사서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는 몇천 년이 흘러도 흐트러지지 않는 이런 통일성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만 한다.

 

갈대상자에 담긴 모세

그렇다면 방주와 갈대 상자 사이에는 어떤 통일성이 있을까? 바로 언약과 구원이라는 모티브(motif)를 통일성 있게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첫째는 사건의 등장인물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노아(נֹחַ)와 모세(מֹשֶׁה)는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쉼도 생명도 스스로 건질 수 없는 시대에 살았다.

홍수로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할 때,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 방주에서 생명을 보존할 것이라는 언약을 한다(창 6:18).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의 이 언약을 믿고 방주를 지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바로의 정책 때문에 모든 유대의 남아가 죽어 갈 때, 레위 지파의 아므람과 요게벳(출 2:1; 6:20; 민 26:59)은 아이의 용모가 준수함(בוֺט)을 보고 갈대 상자를 엮어 살리기로 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아브람(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믿었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손이 사 대(4백 년) 만에 돌아와 애굽 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 그들의 소유로 삼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었다(창 15:12~21). 

애굽에 내려온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야곱이 1세대이고, 레위가 2세대이고, 레위의 딸인 요게벳(남편 아므람)이 3세대였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다음 세대에 그 누군가를 통해 성취될 것을 확신하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 모세의 용모가 준수함(טוֺב)을 보고 그 언약이 이 아이를 통해 성취되길 바랐을 것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23절에서도 모세를 살리는 일에 이들이“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다”(히 11:23)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노아와 모세의 부모에겐 하나님 언약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는 것과 그들이 각각 만든 방주와 갈대 상자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공통된 모티브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성경의 저자가 비슷한 모티브를 가진 사건을 같은 이름으로 묶어 독자들이 깨달을 수 있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방주와 갈대 상자는 구원이라는 같은 모티브를 가지고 있으며, 창세기(방주)와 출애굽기(갈대 상자)의 저자가 같은 인물인 모세다.

모세는 구전으로든 문서로든 노아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방주로 구원을 받은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아브라함의 언약을 믿은 부모가 만들어 준 갈대 상자로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과 흡사함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갈대 상자를 지칭할 때, 방주에 사용한‘테바흐(תֵּבָה)’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신약성경도 노아의 방주와 십계명을 담은 궤(상자)가 같은 모티브를 가졌다고 본다. 그래서 둘을 부를 때 헬라어로‘키보토스(κιβωτός)’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둘은 사뭇 다른 용도로 사용된 것 같다. 하지만 노아를 실은 방주와 십계명을 넣은 궤는 구원과 언약에 긴밀한 모티브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십계명 돌판 때문에 궤를 언급할 때, 수식어처럼 사용된 단어가 언약(διαθήκη) 이라는 단어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우리는‘언약궤’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이처럼 신약 저자들은 노아의 방주와 언약궤를 지칭할 때‘키보토스(κιβωτός)’라는 같은 이름을 붙여 읽는 것이다. 모세가 방주와 갈대 상자가 구원과 언약의 모티브로 엮여 있다는 것을 알고 둘 다를‘테바흐(תֵּבָה)’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불렀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티브들로 시대를 넘어 통일성 있게 엮어 놓은 성경은 다른 신화나 설화나 역사서와는 달리 읽혀야 하고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세상 문학과 달리 시대마다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여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 편집자 주: 최창호 목사는 총신대 M.Div., 칼빈신학교 고대 근동어문학으로 Th.M., 현재 남침례신학교에서 구약학 Ph.D. Candidate이다. 박사 논문“The Syntax of the Infinitive Absolute in the Old Testament”의 full time 집필 중으로 재정적 후원자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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