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하는 자의 기도 2

박준형 칼럼니스트(캐나다)

아, 성경 그리고 분별 (32)

기도는 왜 하는가?

‘빌’ 기(祈)에 ‘빌’ 도(禱). 이게 우리가 아는 기도입니다. “빌고 또 비는 것.” 사전적 의미도 “신에게 소원이나 원하는 것을 빌다”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비는 기도’가 우리의 기도 생활을 가장 왜곡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비는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비는 바를 들어 주시는 분으로 각인되었고, 우리의 기도 역시 우리가 빌 무엇이 있을 때에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건 너무 비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식과 뭐가 다른지요?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결국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들어 주신다고 했지, 자주 떼써야 들어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루에 한 번도 기도하지 않는 신도들의 기를 ‘확’ 죽여 버리는 그 유명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가 있기는 하지요. 쉬지 말고?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에 도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880년 러시아의 어느 시골 청년이 이 말씀을 삶으로 체험해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20세에서 34세까지 14년을 순례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키리에 키리에 엘레이손)!”

그 결과는? “마음으로 하는 ‘예수의 기도’는 저에게 너무나도 황홀한 기쁨을 주어 이 세상에서 저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기도: 대한기독교서회> 중.

물론 이 사례가 우리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압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루에 한 번도 제대로 기도하기 힘든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원할 때, 그 원하는 바를 하나님에게 비는 것이 기도라고 알아왔고, 그 결과 ‘일용할 양식이 없어 배를 굶주려야 할 때’를 빼고는 거의 기도하지 않는 비기도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배를 굶주리는’ 일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기에, 주기도문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이미 오래 전에 그 본연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가지고 더 잘 살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비는 자와 들어 주는 자의 관계가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호락호락 들어 주시던가요?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비는 바를 (열심히) 들으시고 그것에 응답해 주실 때에만 의미 있는 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대단히 잘못된 인식이고, 나아가 대단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의 ‘오직’ 비는 기도가 하나님을 왜곡하고 축소해 버렸습니다.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의 <어린 사무엘>

기도는 일방적으로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우정을 쌓는 것’입니다.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를 세운 현대 복음주의 영성의 대가인 제임스 휴스턴의 말입니다. 

우정은 일방적인 게 아니잖아요. 원하는 것을 빌고 받아 내서야 하나님과 우리가 우정을 쌓을 수 있을까요? 우정은 쌍방의 소통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말하고 듣고, 듣고 말하고, 때로는 가만히 있고, 침묵하고, 인내하면서......

다른 말로 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래서 기도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중요한 겁니다(이게 기도의 본 정의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것). 자기 말만 하는 친구를 누가 받아줄까요?

한국에서만 성행하고 있는 기도원 풍경은 ‘비는 문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산 저 산에서 기도원이 운영되는 것은 ‘비는 신자’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중에 과연 하나님과의 우정을 쌓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기 위해서 온 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하버드 대의 하비 콕스 교수는 이런 한국적인 기도 문화의 근원을 한국적 샤머니즘에서 찾았습니다. 무속/토속신앙이 개신교화되면서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으로 본 것이지요.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인간의 비는 행위 자체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빌고 빌어야 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다만 여기서 나누고 싶은 것은 우리의 기도가 첫 단추를 잘못 꿰었고 이 단추가 너무 오래 채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방적인 기도를 통해(방언도 이런 일종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기계적으로만 알게 되었으니까요. 우리는 ‘하나님께(to)’ 기도를 바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값싼 애인처럼 상대에게 쉽게 기대하고 쉽게 실망합니다. 원망도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뛰쳐나와 방황합니다. 원인은 우리의 ‘온갖’ 기대에 하나님이 ‘일일이, 완전히’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럴 때에는 완벽한 하나님을 찾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하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 한 분만으로 모든 게 충분하십니다.

가장 최근에 언제 기도하셨습니까? 어떤 기도를 드리셨나요?

기도는 하나님과 우정을 나누고 쌓는 것입니다. 아름답지 않나요? 늘 항상 가까이, 우리 안에서, 앞에서,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말하기 전에 우리의 생각을 먼저 아시는 하나님. 그러면서도 우리가 말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잠자코 있을 때, 낙담할 때, 고난 중에 있을 때 성령을 보내 영감을 주시고 때로는 성령을 통해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 친구 같은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 그런 하나님과 우정을 쌓는 것입니다.

이런 ‘인격적인’ 하나님을 맛보아 아는 통로가 바로 기도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우정을 지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정도 자라야 하니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친한 친구 관계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말하고 듣고 서로를 오감으로 느낍니다. 서로에게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얻어내려는 속셈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실망하겠습니까? 그냥 좋아서, 그냥 너무 행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감사의 기도이지요. “기도와 감사는 친구이니까요.” 아마 남들은 미쳤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우정과 소통의 근간 위에서 우리는 기도를 이어갑니다. 그 어떤 청원도, 그 어떤 바람도 서두를 필요 없고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 어떤 ‘절체절명’의 문제/상황 가운데에서도 우왕좌왕하지 하지 않을 테니까요. 먼저 우리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당장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빌기보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부어주시는 한량없는 평화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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