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한국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간판이 있다. 얼마 전까지는 그것이 교회였다. 한국의 산하는 교회 종탑이 포착되지 않는 풍경화를 더 이상 찍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노인요양원과 요양병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통계수치를 보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경험으로 말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많아진 노인관련시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정리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나이 든 사람도 일해야 살 수 있는 이 시대에 일할 수 없는 노인은 분명 무거운 짐임에 틀림없다. 돌보고 안 돌보고의 문제가 아니다. 본인이 일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노인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가족마저 일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 현실에서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분명 해결책이며 필요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중단되었지만, 나는 십 년 이상 요양원에서 예배를 인도해 왔다. 처음에는 요양원에 들어오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일단 적응하면 편리함에 오히려 노인 본인이 만족한다. 치매 노인도 자식에게 짐이 되거나 자식의 발목 잡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말이다.

이제  우리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노인보호시설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노인 되는 것이 장애인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이 들면 누구나 몸이 고장난다. 자연의 순리이다. 건강한 노인도 문화적 장애를 가지게 된다. 노인들은 발전하는 문화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나 같은 중늙은이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어떤 모금 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참여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 십만 원을 입금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아내가 입금할 수 없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입금 번호는 카카오뱅크 번호였다. 나도 아내도 카카오뱅크로 거래할 줄 모른다. 그래서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었다. 이런 일들은 흔하다. 딸들의 도움이 없다면 나는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문화적 장애이다. 몸은 멀쩡한데 장애인이 된 것이다.

생각해 보자. 나는 장애인들의 탈시설을 무조건 지지한다. 장애인 역시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장애인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들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회의 짐이다. 나 역시 장애인은 노인과 마찬가지로 시설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혼자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장애인협회 회장을 지낸 분의 책에서 장애를 가진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았다. 나중에는 국회의원까지 지냈지만 그분은 스무 살 넘을 때까지 외출해 본 적이 없다. 중간에 휠체어를 선물로 받아 그것을 타고 외출한 적이 있지만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휠체어를 타고 나갔다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그것이 유일한 외출이 되었다. 밖으로 나간 적 없으니 교육 받을 기회도 없었다. 많은 장애인들이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 그들은 집안의 수치로 꽁꽁 숨겨진 채 사람으로서 살 기회가 박탈된다. 

그분이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가 읽어 주는 성경을 들으면서 똑같은 소리에 똑같은 글자를 발견하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과정은 정말 인간 승리이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이다. 어쨌든 그분은 글을 깨우치고 빌려다 주는 책을 읽으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스스로 마련했고 마침내 밖으로 나와 국회의원과 장애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만일 그분이 글을 깨우치지 못했다면, 만일 그분이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다 읽지 못했다면, 만일 그분이 준비가 되지 않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면 그분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분은 사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장애인협회 회장이 된 그분이 장애인 가운데 특별한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겐 다른 경험도 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나의 큰형은 청각 장애를 가진 분이었다. 말을 배우지 못해 초등학교에 늦게 입학했다. 그런데 의사 소통이 안 되고 나이가 많아 자주 아이들을 때렸다. 문제아가 된 것이다. 

그래서 청각장애인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해서 형은 수화도 하고 식구들과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청각장애인들이 청각장애인 중고등학교를 나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모든 청각장애인들이 수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연한 기회에 청각장애인들을 돕는 장함공동체라는 목사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청각장애인들 가운데 수화를 할 수 있는 청각장애인들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그야말로 ‘바디랭귀지’ 외에는 대화 수단이 없었다. 울부짖는 듯한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장애인 돌봄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다운 삶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장애인을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장애인 정중규씨의 글을 읽었다. 글의 주제는 당연히 장애인 문제였다. 천주교 신자인 그분이 가장 심각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꽃동네와 같은 대형 장애인 시설이었다. 그분은 그곳에서의 비인간화를 지적하고 탈시설이야말로 장애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역설했다.  

노인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람은 반드시 장애의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그 장애라는 짐을 나눔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사람이 된다. 그것을 거부하는 순간 장애를 가진 사람은 물론 장애를 가진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 역시 사람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일전에 어떤 마을이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노인들이 요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죽을 수 있는 마을을 목표로 삼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정말 훌륭한 마을이다. 재배한 송이버섯을 마을 주민 전체가 관리하고 수익을 똑같이 배분한다. 

노인들은 더 이상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노인들에게도 똑같이 수익이 분배된다. 돈만이 아니다. 그분들은 가족의 품에서, 가족이 없는 분은 마을 사람의 품에서 죽을 수 있다. 그들은 탈시설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들에게서 사람의 존엄을 본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본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

그런데 교회는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디 있는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교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정말 창조주이신가.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장애인들만이 아니다. 누구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자매이다. 그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아무리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시인하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해도 그 사람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갈 것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사람 연기(演技)를 하게 되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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