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삶은 시작도 은혜, 과정도 은혜, 결말도 은혜이다. 은혜 안에서, 은혜를 통해서, 은혜로 결말지어지는 것이다.

은혜 따로, 행위 따로가 아니라 100% 은혜이다. 은혜 안에서 나오는 행위, 은혜를 통해서 나오는 행위, 은혜로 결말지어지는 행위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은혜적 행위인 것이다.

은혜와 믿음은 동의어이다. 자기 노력과 자기 행위에 반하는 의미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은혜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신자의 행위이지만, 은혜를 받은 이후에 은혜에 뿌리를 내려서, 거기서 모든 은혜적 행위가 나오게 하는것은 개개인이 끊임없이 감당해야 하는 영적 싸움을 통해서이다.

신자의 어떤 행위가 바른 행위이고, 그렇지 못한 행위인가를 측정하는 시금석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 혹은 직ㆍ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영혼들을 돕고 섬기는 모든 행위는 자동적으로 선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로 맡겨 주신 영혼들을 섬긴다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일의 성격 자체가 하나님을 자동적으로 기쁘시게 한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교회 안에서 일하면서도 은혜에 기초해서 나온 행위들이 아닐 수 있고, 직장 생활이나 사업을 하면서도 그것이 은혜에서 나온 행동일 수 있다. 전자는 영적으로 보면 악한 행위가 되고, 후자는 선한 행위가 될 것이다.

어떤 행위가 은혜에 뿌리를 두고 행해진 것이라면 늘 겸손과 감사로 귀결된다. 수고하면 할수록 더 많이 겸손해지고, 감사가 늘어난다. 그런데 그 행위가 은혜에 뿌리를 두고 행해진 것이 아니라면 수고하면 할수록  겸손과  감사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만과 불평이 늘어나게 된다.

은혜에 뿌리를 두고서 행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혹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선한 행위를 한 것이라는, 그 자체로 감사하는 것인 반면, 은혜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행위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과 능력이 행한 것이라는, 자기 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만 자랑하는 곳이고,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는 곳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곳이고, 성부 하나님이 하신 일, 성자 하나님이 하신 일,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자랑하는 곳이다. 교회에서 사람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마르다는 은혜에 보답하고자 예수님을 집에 초대해서 섬겨 드리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과 마리아를 향해서 폭발하였다. 은혜에서 시작했으나, 도중에 은혜에서 이탈한 것이다.

은혜에서 시작하고, 과정도 은혜롭고, 결말도 은혜로 마치려면 거기에는 은혜에서 자기 의로 기울어지는 행위로부터 적극적인 자기 부인과 은혜로 회귀하려는 치열한 영적 싸움이 요구될 것이다. 은혜로 시작한 믿음 생활인데, 그 과정 속에서도 은혜에서 이탈하지 않고, 은혜로 마치는 삶은,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을 이루는 것보다 더 힘들고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0,11).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삶이요 이제까지도 그러합니다. 오늘도 은혜로 시작하오니 일생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은혜를 통해서, 은혜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살도록 성령님, 도우시고 붙잡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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