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을 막을 힘을 가지고 있다."

 

최근 오래된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그 친구는 십대에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결정을 포함해, 내게 아주 큰 영향을 준 친구이다. 점심을 먹다가 “하루종일 상담가를 만난 것보다 두 명의 친구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게 더 낫다”던 어느 목사의 말이 떠올랐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말에 분명 동의할 것이다. 그 역시 “진정한 우정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미국인의 삶 설문조사 센터(SCAL)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고독이라는 전염병에 걸려 있는 듯하다. 뉴욕 포스트의 벤 코스트는 이 연구 결과를 언급하면서 “미국인의 사회 생활에서 친구의 역할이 감소하는 징후가 보인다”라고 썼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미국인들이 예전보다 친한 친구가 줄고, 친구와 이야기하는 빈도도 줄고, 개인적 지원을 친구에게 덜 부탁한다.” 이 충격적인 설문조사에서 미국인의 49%는 친한 친구가 3명 미만이라고 응답했다. 12%는 현재 친구가 없다고 응답했다. 이는 30년 전보다 4배 늘어난 숫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고독이라는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고 치료해야 한다.

마가복음 12:30-31에서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우선 하나님의 계시와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된다.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지속적인 예배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된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완전한 아버지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을 하신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을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

우리는 또한 서로 사랑하도록, 즉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아버지와 거룩한 형제자매를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면서 가장 깊은 차원에서 연결되도록 창조되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연결이라는 과제를 주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발생한 가장 파괴적인 결과는 사망자 수를 제외하고는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의 양일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연결의 가장 큰 장애물은 아니다. 우리의 죄 많은 본성이 사랑의 연결을 차단하고 파괴하는 이기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행동하도록 만든다. 이는 인간 조건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사랑하길 원하고 깊은 관계를 맺길 원하고 이웃과 하나 되길 원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기심은 우리를 계속 취약하게 만든다.

고로 우리는 좋은 관계를 맺는 훈련을 위해 날마다 예수님과 성령의 구원 및 변모 역사가 필요하다. 지역교회 안에는 이웃과의 관계 맺음을 증진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첫째, 함께 시간을 보낸다. 코로나19로 인한 제약과 고립이 인간 존재의 위대한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테크놀로지가 아무리 유용해도, 이웃이라는 물리적 존재를 대신하지 못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도 이웃들과 함께 온전히 존재하려면 테크놀로지를 제한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께 함께해 달라고 기도한다. 사람들은 아플 때 가장 외롭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서로의 장점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거리 100마일에 깊이 0.5인치인 지인들만 많이 가질 위험이 있다.

잠언 18:24은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라고 경고한다. 친구는 적더라도 진정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좋다. 그러한 친구 맺음에 시간을 투자할 계획을 세워라.

둘째, 함께 축하한다. 서로를 축하해 줄 때 우리는 서로 연결된다. 생일, 결혼식 혹은 여러 통과의례가 중요한 이유이다.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고 말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현재 상황이 최고가 아니어도 이웃과 함께 축하하는 사랑과 겸손의 선택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나 자신의 환경을 넘어 이웃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은 이타적인 선택이다.

이웃의 인생의 즐거운 순간들을 축하하는 증인의 무리에 속하는 것보다 매번 자신이 기쁨의 승자가 되고 싶은 건강치 못한 영혼을 고백하고 회개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이웃과 유대를 맺는 수단으로 주일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함께 예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셋째, 서로 섬겨야 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빌 1:27)을 촉구했다.

운동 선수들은 운동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트로피가 아니라 동료 선수의 동지애라고 고백한다. 교회에서도 각자의 사역을 공유하면서 유대가 깊어지는 모습을 자주 본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기 위해 교회 내 어디에서 당신은 팀을 이룰 수 있는가?

넷째,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이웃과 관계가 깊어지려면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성경 역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b)고 말한다.

우리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은 고통이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신의 취약함을 이웃에게 숨기고, 상처 받지 않고 두려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유혹, 죄, 중독, 두려움, 좌절과 실패와 같은 문제가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데 전문가들이다. 이것이 소셜 미디어가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인생의 장점만 보여 준다.

존 클레이풀 목사는 고백적인 스타일의 설교와 가르침으로 유명했다. 그는 승자가 희생자에게 충고하는 것보다, 같이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자신의 고통과 눈물 혹은 그 반대의 것을 이웃에게 허락할 때, 우리는 성소에 발을 디딘 것이다.

목사로서 내가 서본 가장 거룩한 성소는 병원 중환자실이었다. 그곳에서 장기 기증을 약속한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가 안녕 하고 인사했다. 그러한 경험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관계를 맺는다.

전쟁터에서도, 인생의 최악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도움을 함께 구하며 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고 마음을 나눈다.

지금 당신 자신의 우정을 돌아보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보라. 친구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의 선물이다. 문자가 아니라 전화를 걸어 점심을 먹자거나 커피를 마시자고 초대하면서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내놓을 수 있는가?

교회는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을 막을 힘을 가지고 있다. 친구와의 우정이 더 깊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리고 예수님이 당신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듯이, 당신도 이웃에게 친구 되는 길을 모색하길 바란다.

(* 편집자 주 - 데니슨 포럼의 상임 자문 마크 터먼 목사의 8월 10일 칼럼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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