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목사(유니온교회 담임, 미주 성결대 교수)

언론사역을 하는 사람들 마음에 크게 걸리는 성경 말씀 몇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가 그 하나입니다.
지금도 미주와 한국, 아니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못 된 목사들이 있는지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목사 이름을 가졌거든 어떻게 해서 목사가 되었건 그래도 상식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나쁜 목사들의 비행을 폭로하는 글을 써 달라는 요청도 심심치 않게 옵니다. 그럴 때마다, “너는 그래 그 목사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느냐”는 음성이 들려오기 때문에 포기하게 됩니다.
사실 비판기능은 보도기능과 함께 언론의 기본적 존재이유입니다. 그런데 저런 사람 때문에 전도의 문이 꽉꽉 막히게 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돌을 던질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에 사뭇 혈압이 오릅니다. 하도 답답해서 신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여러 가지 좋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돌로 친다는 것은 죽인다는 뜻이니까 죽이지는 않는 작은 돌을 던지면 되겠지요.”
“적극적으로 풀었으면 좋겠네요. 돌을 던짐으로 오히려 그를 살리는 것이라면 열심히 돌을 던지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 구절 아래 있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라는 곳에 주목하십시오.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양심적인 일이라면 돌을 마음껏 던져야 합니다.”
역시 신학자들의 자문 받기를 잘 했다 싶습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하나를 더 꺼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산상수훈에 있는 말씀입니다만, 이 말씀 때문에 기독교 언론들이 늘 주눅들곤 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목사들의 비리가 곪아 터져도 끽소리도 못 하는 기독교 언론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는 말씀처럼 세속언론들이 대문짝 만하게 선동적으로 보도하곤 합니다. 기독교계가 능히 호미로 막을 수 있는 물인데 가래로도 못 막게 되고 그래서 예수님 옷에 크게 먹칠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그 말씀도 더 적극적으로 풀어야만 합니다. 비판 받을 각오를 하고 비판하라는 뜻입니다. 그 아래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네 눈의 들보를 뺀 다음에는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문제는 언론사역자들이 자기 눈의 들보를 빼지 않은 채 다른 이들의 눈의 티를 빼라고 아우성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어디 언론사역자뿐이겠습니까? 목회목사들은 좀 낫습니까?  하여튼 결코 비판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확히 밝혀진 셈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 질 각오를 가지고 바르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비판하라는 뜻일 뿐입니다. 다만 살리기 위한 비판일 경우에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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