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보다 더 어려운 것은 화해입니다. 용서가 마음의 문제라면 화해는 행동의 문제입니다."

마치에요프스키 성경 안의 삽화. 이복 오빠 암논에게 겁탈을 당하고 문밖으로 쫓겨나가는 다말.
마치에요프스키 성경 안의 삽화. 이복 오빠 암논에게 겁탈을 당하고 문밖으로 쫓겨나가는 다말.

곽성환 목사(PMI 바울 선교원)

가족간의 성범죄,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복 오빠가 여동생을 강제로 추행, 강간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원치 않는 관계를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직후에 모욕적인 말과 함께 버림받은 여동생은 충격과 아픔에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친오빠는 분개했지만 그 역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내막을 알게 된 아버지가 잠시 역정을 냈을 뿐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남편의 바람을 하소연하는 딸에게 남자가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아버지나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시어머니와 같은 처사입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성범죄에 의한 피해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 듯합니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그때 그 일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자신을 망치는 사건이었는지를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동생을 애틋하게 사랑했던 친오빠는 복수심을 속으로 삭이며 때를 기다립니다. 마침내 여동생을 욕보인 이복 형제를 죽이고야 맙니다. 그리고는 가출해서 멀리 도망갑니다.  자식 중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폐인이 되었으며, 하나는 집을 떠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잡힌다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죄를 저지른 아들들과는 별도로 부모 역시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큰 아들의 비뚤어진 성의식도 알지 못했고, 딸의 눈물도 닦아 주지 못했으며, 다른 아들의 보복 살인도 막지 못했습니다. 이토록 무관심하고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부모가 또 어디 있을까요?  

요즘도 신문의 사회면에 나오는 성 관련 사건이기도 한 이 이야기의 당사자는 바로 이스라엘의 왕 다윗입니다.  왕으로서의 다윗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가장으로서의 다윗은 최악에 가깝습니다. 우유부단하고 비겁하고 회피적입니다. 시간이 흘러 집 나간 아들인 압살롬의 소재지가 밝혀지고  사람들의 구명 운동과 관계 회복의 조언을 받아들인 그는 압살롬이 돌아와도 좋다고 허락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면 더 많은 근신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일까요? 최종적인 메시지는 오기는 오되 아버지 앞에는 나타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이런 결정은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압살롬의 억울함, 서운함, 강퍅함은 더 커졌고, 결국 그는 4년 후 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는 반역을 저지르게 됩니다. 다윗 가족사에 큰 오점으로 남은 사건입니다. 

용서와 화해라는 관점에서 이 사건의 원인들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용서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이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봐준다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암논과 다윗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암논을 잘못 용서했고, 압살롬을 제대로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용서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영역이고 피해자의 고유 권한입니다. 때문에 용서하고 안하고는 그 사람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음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는 용서에 실패한다면,  그  감정은 점차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괴물로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의 말대로  용서는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철저히 자신을 위한 것, 즉 이기적인 선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용서가 어려운 것일까요?  

그런데 용서보다 더 어려운 것은 화해입니다. 용서가 마음의 문제라면 화해는 행동의 문제입니다. 전자가 피해자의 일방적 선언으로도 가능하다면, 화해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쌍무적 행동을 요구합니다. 화해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으면서도 자신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것은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화해는 서두르거나 강요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를 만들어야 하고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화해의 필요성에 대한 다윗과 압살롬의 시간 차이가 부자지간의 전쟁으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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