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준 장로(워싱턴 주)

70여 성상을 지켜보았건만 여전히 계절의 변화의 경이로움과 정확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매연과 세파에 찌든 도심에서보다는 여백의 공간에서 자연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입추를 맞은 하늘이 나날이 높아만 가고 살 속을 파고드는 따갑고 쾌청한 날씨가 각종 과일을 맛있게 익혀 주는 계절이 되었다. 아직 삼복 더위의 서슬이 퍼런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빨간 고추잠자리가 푸른 하늘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하면, 잠자리의 날갯짓을 타고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 구름을 밀어내고 높아만 가는 하늘을 보며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지난 6월 말경에 기록적인 불볕더위가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는 듯이 110도를 넘나드는 기온에 연한 소나무 잎사귀와 꽃나무들이 화상을 입고 빨갛게 말라 들어갔다. 마치 사우나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것을 연상케 하는 열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처참했다.

수많은 사람이 무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에어컨이나 선풍기 등 각종 냉방장치를 가동하는 통에 과부하가 걸려서 전기까지 가버린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많은 손님이 몰려들어 시원한 물, 맥주, 아이스크림, 얼음 등을 찾아서 북새통을 이루는데 전기가 없으니 어두운 가게 이 구석 저 구석에 촛불을 켜야 했다. 다행히 작은 발전기가 준비되어 있어서 아이스크림 냉동고와 금전등록기는 사용할 수 있어서, 기록적으로 무더운 날이라는 것도 잊고 아내와 둘이서 정신없이 일했다.

지난 주일 예배가 끝난 후 이 지역에 오래 사시며 많은 활동을 하시는 최 권사님의 안내를 받아 우리 부부는 블루베리 농장으로 갔다. 한 시간여 달려간 곳은 북쪽으로 높은 산이 둘러 있고, 앞으로는 탁 트인 평지가 펼쳐진 수백 에이커의 농장 지대였다. 5에이커쯤 되는 블루베리밭에는 나뭇가지가 휘어져 땅에 닿을 정도로 블루베리가 많이 열렸다. 일반에게 개방하는 마지막 날이어서인지 나무 밑에 떨어져 뒹구는 것들이 땅이 안 보일 정도로 쌓여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블루베리를 따고 있었다. 아내는 이렇게 많이 열린 것은 처음 본다며 즐거워했다.

블루베리는 항산화 성분이 많아 노화 방지를 해주고, 뇌 기능을 향상하고, 혈압을 낮추고, 콜레스테롤을 안정시키고, 암을 예방하고, 소화를 돕고, 체중 감량을 돕는 등 효능 많은 슈퍼 푸드라고 알려져 있다. 얼리면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영양소가 증가한다는 학자들의 연구 발표도 있다.

나도 이들 틈에 끼어 부지런히 따서 농장에서 제공한 작은 통에 담기 시작했다. 처음 가본 농장이라서 어색했으나 곧 익숙해져서 통을 밑에 대고 잘 익은 송이들을 잡고 훑으니 손쉽게 딸 수 있었다. 너무 잘 익어서 살짝만 건드려도 마구 쏟아진다. 나무마다 잘 익은 것과 굵은 알이 눈에 들어왔다. 따가운 햇볕에 자연 건조되어 약간 쪼글쪼글한 것을 한 움큼 따서 입에 넣으니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입안에서 용솟음쳤다.

인건비가 비싸서 자기들이 따놓은 것은 4달러/파운드이고 손수 따는 것은 2달러/파운드였다. 물론 따면서 먹는 것은 무료였다. 주위를 돌아보니 울창한 숲과 각종 유실수, 옥수수밭 등 풍요로운 농촌 풍경이었다. 내가 어릴 적 농촌에서 자라서인지 포근하고 풍성한 것이 마치 내 고향 품에 안긴 것 같았다.

이 지역에는 한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농장도 있고, 여러 가지 과일과 채소, 옥수수 등 다양한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할로윈데이를 위한 호박을 고르러 다닌 추억도 있다.

가을이면 무, 배추 추수가 끝난 후 한인들에게 무료로 남은 채소를 가져가도록 하여 이삭줍기하는 심정으로 한 아름씩 가져다 먹은 추억도 있다. 잘 자라 실한 것들을 대충 거두고 난 수십 에이커의 들판에는 채소들이 가득했다.

몰라서 못 하고 시간이 없어서 못 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자연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건강과 환경을 허락하신 은혜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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