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훈(수필가, 민영 소망교도소 교도관)

그는 왜 이십 년 전 수인(囚人)이었을 때 신었던 그 운동화를 다시 신고 싶어 했을까? 지금 수용자들이 신고 있는 하얀 운동화를 한 켤레 구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내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기야 수용자들이 신고 있는 운동화가 특정 지어진 건 아니다. 어차피 외부 공장에서 만들어 납품하는 것이다. 단지 끈이 없고 일명 찍찍이로 편리하게 붙이고 떼는 기능이 다를 뿐이다.

내게 운동화에 얽힌 추억은 짠하다. 학창 시절에 신었던 운동화는 검정 운동화였다. 품질과는 상관없이 그때 학생들이 신던 보편적인 패턴이었다. 운동화는 소중했다.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아무래도 많이 걷는 일상이었다. 그뿐 아니라 젊었으니 한참 뛰고 달리던 때여서 운동화는 쉬이 닳아 해어지기 마련이다. 생각보다 운동화는 금방 낡아졌다. 운동화 앞축이 떨어지고 하얀 양말이 드러날 즈음에야 어머니께 슬그머니 보여드렸다.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다. “그렇잖아도 다음 장날 네 운동화를 사려고 그랬다.” 그러시면서 내일 학교가 끝나면 읍내 가게에 가서 발에 맞는 운동화를 우선 신으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단골 가게였다. 지금도 생생한 효창고무상회.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가게에 갔지만 선뜻 운동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주뼛거렸다. 주인 아주머니는 내 상황을 단박 알아채고는 운동화가 떨어져서 왔구나?” 하셨다. 그러면서 신고 있던 내 운동화를 보더니 새 운동화 한 켤레를 건네주며 신어 보라고 하였다. 꼭 맞았다. 선뜻 외상 신발을 내주던 아주머니가 지금 생각해도 고맙기 그지없다. 어머니는 이틀 뒤 콩 한 말을 머리에 이고 돈 사서운동화값을 지불했다.

내 고향 사투리 가운데 참 재미있는 말이 돈 산다이다. 그러니까 곡식을 장에 내다 파는 것을 판다고 하지 않고 역설적으로 돈을 산다고 한 것이다. 반대로 사서 가지고 오는 것은 판다고 하였다. 쌀을 사온 것을 쌀 팔았다고 하였다. 언어도 시대적으로 변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 시절 가난이 밑바닥에 깔렸던 우리나라 시대 상황이었음이 역력하다.

새 운동화 한 켤레를 샀다. 이번에는 제법 이름있는 운동화다. 웬만하면 하루 만 보 넘게 걸으려고 한다. 걷는 만큼 건강하다고 한다. 요즘 걷기를 권장하는 토스앱이 인기다. 하루 오천 보를 걸으면 십 원, 만 보를 걸으면 삼십 원, 또 다른 친구 몇 명을 불러 합산하여 삼만 보를 걸으면 이십 원, 오만 보를 넘게 되면 사십 원을 보태 즉시 백 원이 입금되는 방식이다. 운동하고 돈 벌고 일거양득이다. 한 가지 덤은 백 원이라는 돈의 가치를 원시적으로 귀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신발에 관한 아슴푸레 진한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운동화를 신기 이전에는 검정 고무신이었다. 더러 아버지가 신던 흰 고무신도 신었다. 장맛비가 내리던 어느 여름날 집 앞 개울가에서 고무신을 가지고 뱃놀이를 하다가 그만 신발을 놓치고 말았다. 고무신은 둥둥 떠내려가고 신발을 찾아 개울물을 따라 달려가던 그 세월이 내 인생이었다. , 옛날이여!

그 형제에게 새 운동화를 사서 선물로 주었다. 담 안에서 신는 그다지 비싸지 않은 하얀 운동화다. 왜 부끄럽고 지난날 아픔이 스민 신발을 다시 신고 싶은가? 묻지 않았다. 그도 쑥스러운지 선뜻 대답하지 않고 있다. 다만 하루하루 새로운 날을 살고 있다고 하였다. 건축 현장에서 날일을 하는 그는 하루가 저물면 달력 날짜 밑에 감사라고 써 놓는다고 하였다. 존재의 가치가 감사인 그다. 본받아 나도 아로새겨야겠다. 칠순이 가까워지는 그 형제와 내 남은 생애, 모든 발걸음이 복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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